굳이 사회적경제의 역사를 들여다보기로 하면 수백 년 이전부터의 시도가 있었고, 그 방식은 공동체의 유지 혹은 결핍의 해결과정으로 이어져왔다.

‘묻지마, 종자돈’ 정기총회 모임

최초의 협동조합 모델로 많이 알려진 영국의 ‘로치데일 공정개척자조합(1844년)’은 노동자 28명의 시작으로 2016년 말 기준 4천500여개의 도매점과 450만명(정회원) 이상 규모의 세계 최대 소비자협동조합(2001년 ‘The Co-operative Group’으로 재조직됨)으로 성장했다. 200년에 가까운 역사 속에는 그 사회와 사람들이 겪어냈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산업의 팽창과정에서 소외됐던 빈곤층 노동자들의 협동이 당시엔 그들 자신의 문제해결을 위한 허름한 발버둥일 수 있었지만, 그들로부터 시작돼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결코 작지 않은 영향력이 작용해왔다.

협동조합 원칙을 만들어내고, 공통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운영방식들은 평등을 기반으로 교육, 금융, 고용, 사회서비스, 지역공동체 환원 등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사업을 위한 확장보다는 시대의 변천과 함께 요구된 지역공동체의 필요들이 사업화돼왔고, 그 과정이 오랜 시간을 쌓고 나서야 들여다보이는 셈이다. 경제적으로만 따져도 지난해 4분기에 1천5백만 파운드(한화 약 210억원) 이상이 조합원 및 해당 지역사회 공동체에 환원됐고, 현재 영국 전역에 7만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 그룹으로 자리하고 있다. 또한 소비자 권리 입법, 협동 벤처 후원, 정직한 먹거리 표시제, Fairtrade(공정무역) 정착, 동물복지, 신재생에너지 확산, 지역사회 프로젝트 투자 등의 노력은 2014년 영국 국민의 70%가 ‘올바른 사업수행 조직’으로 믿고 있다는 조사결과로도 나타났다. 그들의 시간을 추적해 보면서 함께 떠오르는 것은 춘천에 있는 ‘춘천두레생협’이었다.

열흘 전 있었던 정기총회를 통해 돌아본 춘천두레생협은 이제 막 20년을 넘겨오면서 지역에서의 끊임없는 공동체 실험을 싹틔운 하나의 텃밭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성공과 실패, 혹은 수치로 보는 효과를 가늠하기 이전에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시도들이 꾸준히 이어져왔음이 흥미로웠다. 지역경제 순환을 위한 대안화폐 활동, 방사능생활감시단 활동, 사회협동금융을 꿈꾸는 ‘묻지마 종자돈’, 공동부엌, 육아모임, 지역민의 역할 만들기를 위한 워커즈, 로컬푸드 활성화 등 조합원에 국한되지 않은 지역 활동으로의 씨뿌리기가 끊임없이 진행돼온 시간들이 들여다보였다. 더러는 사라지기도, 더러는 눈에 띄지 않기도, 조금 더 기다리며 끈을 잡고 있기도 한 제각각의 모습들이 지역의 토양 안에 거름으로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중 ‘묻지마 종잣돈’은 2013년 1월, 8명의 평범한 아줌마들이 지역을 위해 ‘월 1만원의 협동’ 씨앗을 뿌린 것이 현재 약 40여명의 회원으로 늘어났다. 어느새 1천만원 기금마련을 눈앞에 두고 있으며, 지난 3월 2일엔 6번째 ‘문턱 없는 소액대출’이 이루어졌다. 지역의 소규모 사회적경제 업체들에게 마중물이 되는 금융지원이 조금씩 싹을 틔워가고 있는 것이다. ‘시민뱅크’, ‘희망금융’, ‘협동금융’으로 꿈을 그리는 사람들의 4년이 이젠 땅 위로도 싹을 내보인다. 무엇이 되고, 어떤 열매가 맺힐지는 이제 또 함께 할 ‘희망’과 ‘협동’의 물붓기와 햇살에 달려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부러워하는 사회적경제 선진모델들과 비교하면, 우리 지역의 현실은 아직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형국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잔뜩 가물어있는 사람살이에 물을 한 가득 채우기보다는 새는 듯 보여도 깊숙한 갈증을 해갈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이다. 땅이 충분히 적셔지면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 하나에도 뿌리가 내려지고 시나브로 꽃이 피기 시작할 테니 밑질 것 없는 일이다. 먼 산보고 한숨만 쉬기보다는 한 바가지 물이라도 땅에 스며들게 해보자. ‘천천히 서둘러라’가 더욱 와 닿는 요즘이다.

김윤정 (협동조합 교육과나눔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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