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교교(皎皎)하게 빛나는 달 아래, 온 천지 푸르스름한 달빛 속, 끝없이 펼쳐져 검게 일렁이는 물 앞에 서있는 흑인 소년이 뒤돌아본다. 영화 ‘문라이트’의 마지막 장면은 한 소년이 날선 세상과 직면했을 때 느꼈을 두려움, 낯설음, 외로움을 공감하게 하면서 마침내 그 세상을 살아내 우뚝 설 수 있게 되었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주인공 흑인 소년의 성장시기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뉜다. 유년시절 ‘리틀’, 16살 고등학교 시절의 ‘샤이런’, 이십대 ‘블랙’. 세 부분 연기자들의 모습은 전혀 공통점이 없지만 일관되는 성향은 낯가림 심하고 상처받기 쉬운 여림.

마이애미 흑인들이 사는 한 빈민촌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작고 말없고 항상 따돌림 받는 소년 샤이런은 별명도 ‘리틀’이다. 싱글맘 엄마의 이중적인 태도에 마음의 빗장을 걸어잠근 상태, 유일한 친구는 케빈뿐. 어느 날, 놀리는 친구들에게 쫓겨 달아나다 마약판매상으로 15번가를 주름잡는 후안을 만난다. 후안은 자신은 마약상으로 살지만 샤이런에게 자긍심을 갖도록 타이르고 들어주고 아껴준다. 후안이 샤이런에게 해주는 말. “달빛 아래에서 미친 듯이 뛰놀았지. 달빛 아래서는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빛이 난단다. 누구라도 달빛 속에서는 푸른 색으로 보인다.” “흑인은 어디에도 있다. 인류 최초의 인간은 흑인이었으니까.” “자기가 무엇이 될지 결정할 때 남이 결정하게 하지 마라.” 엄마를 싫어한다는 샤이런에게 “나도 그랬다. 그렇지만 지금은 엄마가 미치도록 그리워.”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겪고 현재는 마약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후안이지만 샤이런에게는 인생의 멘토다.

‘샤이런’부분 - 16살 샤이런은 동성애적 기질로 친구들에게 끊임없이 괴롭힘 당한다. 후안은 죽고, 상처뿐인 나날이 계속되고 괴로움 끝에 찾은, 달빛 내려앉은 바닷가에서 우연히 케빈을 만나게 된다. 수줍고 내성적인 샤이런과 남성적이고 쾌활한 케빈은 달빛을 매개로 교감하며 사랑을 나누게 된다. 며칠 후, 급우 테렐의 위협에 진 케빈에게 맞게 되고 집단폭행을 당한 샤이런은 테렐을 의자로 내려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된다. 차에 타며 케빈을 돌아보는 샤이런의 아픈 눈빛.

‘블랙’은 케빈만이 부르는 ‘샤이런’의 호칭. ‘블랙’부분 - 20대 변한 샤이런의 모습을 보여준다. 수숫대처럼 말랐던 10대의 모습과는 딴 판. 우람한 덩치에 목걸이, 팔찌, 시계, 이빨 모두 ‘골드’. 애틀란타에서 제법 성공한 마약상이 돼 있다, 그러던 중 받게 된 케빈의 전화. 10년 만이다. 마이애미에서 요리사가 돼 있고 어느 손님이 튼 노래를 듣다가 문득 생각이 나 수소문해 전화하게 됐다는. 마약환자보호소에 있는 엄마와 화해한 후, 샤이런은 케빈을 찾아 1천km 길을 떠난다. 마이애미의 한 쿠바식당. 샤이런, 자리에 앉아 가만히 케빈을 지켜보고 있다. 주문 받으려다 깜짝 놀라는 케빈. 그가 가져온 스페셜 요리를 맛보며 그간의 안부를 나누는 두 사람. 사고를 쳐 소년원에 갔었고 이후 고교 동창과 결혼해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지만 아내와는 별거한다는 케빈은 샤이런에게 “아직도 세 마디 이상 안하느냐”고 놀리면서도 외모는 변했지만 떨리고 수줍고 상처받기 쉬운, 내면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샤이런을 확인한다. 버스로 출퇴근하는 신산한 삶을 얘기하면서 케빈은 말한다. “그래도 불안하지 않은 진정한 삶, 자유로운 삶이 있는 생활”이라고.

초라한 케빈의 집에서 마주 한 케빈과 샤이런. 고교시절, 때릴 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행동을 사과하는 케빈에게 샤이런은 말한다. “나를 만져준 사람은 너 밖에 없었다.”

89회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문라이트’의 감독 베리 젠킨스와 감독상을 받은 ‘라라랜드’의 데미언 채즐 감독 모두 30대다. 젊은 감독들의 작품이라 그런가. 두 작품 다 군더더기가 없지만, 특히 ‘문라이트’의 빈틈없고 절묘한 짜임은 한 번 봐서는 눈치 채지 못할 터! 마지막 부분 두 사람의 재회 장면. 식당 안, 흐르는 바바라 루이스의 노래. “헬로, 낯선 사람, 다시 만나 기뻐요. 이게 얼마만예요. 들러줘서 기뻐요. (우리 사이) 그렇지 않았나요? 정말 오랜만예요.” 재회의 평범한 이야기 속에 느껴지는 그 떨림과 사랑의 확인, 오래도록 잔상에 젖어 곱씹어 보게 된다. 정말 교교한 달빛처럼 사람을 설레게 하고, 광기에, 무엇으로도 누를 수 없는 본성에 물들게 하는 게 또 있을까!

 

이경순 (홀트강원후원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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