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장은 갑골문과 함께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3개의 청동 인장이다. 주(周)와 춘추전국시대에는 관인과 사인이 있었으나 규격이 정비되지는 않았다. 그 후 진(秦) 시황제가 황제의 것만을 ‘새(璽)’라고 하고 옥을 사용하게 해 ‘옥쇄(玉璽)’라는 말이 나왔다. 벼슬아치들은 ‘새(璽)’라고 하거나 옥을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 금·은·동을 사용해 문관은 ‘인(印)’이라는 글자를, 무관은 ‘장(章)’이라는 글자를 써 ‘인장(印章)’이 됐다. 한(漢)이 진의 제도를 이어받아 ‘국새(國璽)’를 비롯한 관인의 제도가 동양 각국에 현재까지 내려오게 됐다.

금속 인장은 녹이고 주조하는 과정이 복잡하므로 제작이 어려웠다. 그러다 원(元)의 왕면이 화유석이라는 돌을 발견했다. 이는 칼로 직접 새길 수 있었으므로 전각(篆刻)이라는 독특한 예술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현재 전각은 다양한 예술장르에서 사용된다. 서예, 한국화, 동양화, 사군자, 서각, 캘리그라피를 넘어 서양화 등에도 작품성의 제고와 작가의 이니셜을 위해 전각작품을 날인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전각은 고유한 영역이 없이 다른 예술 장르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전각은 한자문화권의 국가들이 모두 인정한 독특하고 고유한 예술장르다. 전각은 스스로의 미학을 추구하며 나름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그 외에 다른 예술 장르의 작품성을 높이는 부수적 기능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미술은 고대 동굴벽화로부터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까지 가능한 모든 기법을 시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 중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예술장르가 전각이라는 논의가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현대에 들어 전각석이 점차 고갈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전각석 산지였던 해남은 이미 10년 전에 고갈되었으며, 중국도 서서히 고갈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후의 전각은 돌을 넘어서 다양한 재료적 접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중국과 대만, 일본 등의 국가에 비해 우리나라는 전각 인구가 매우 적으며, 이론적 연구체계도 미흡해 전문적인 학회 하나 없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인장과 전각작품이 실재한다. 그러므로 전각은 더 많이 보급하고, 수준 높은 작가를 배출해야 하며, 이론을 연구하고 작품성을 높이는 다양한 시도와 작가 간 교류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전각은 문자학, 한문, 회화, 조각, 판화를 겸한 종합예술로서 높은 예술적 안목과 능한 실기를 필요로 하므로 짧은 시간에 간단히 이루어지지 않는 한계를 가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전각가의 부단한 예술적 상상과 시간 투자가 마땅히 전제돼야 한다. 그를 바탕으로 일반 대중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술장르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원용석 (한국전각학연구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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