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대폭포를 지나자 거북바위가 길옆에 우뚝하다. 바위 아래에 신규선(申圭善)이 새겨져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춘천군수를 지내며 《청평사지》를 편찬하도록 한 장본인이다. 청평사를 소개하는 안내문이 바로 위에 있다. 안내문 옆으로 계곡물이 흐른다. 물을 건너면 너럭바위가 넓게 펼쳐져 있어 쉬기에 적당하다. 이곳은 청평사로 오고가는 사람을 맞아들이고 전송하는 공간이었다. 눈을 감자 술잔을 나누며 이별을 아쉬워하는 옛사람들의 소리가 두런두런 들린다. 너럭바위는 청평사의 문에 해당되는 곳이며, 아쉬움의 술잔과 이별의 정회를 읊던 창작의 공간이어서, 늘 ‘청평팔경’ 중의 하나로 꼽히곤 했다.

너럭바위 옆에 구송정이 있었다. 아홉 그루의 소나무가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얻었고 구송대라 부르기도 했다. 청평사로 향하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옛길이 계곡 건너편에 새로 생긴 넓은 길 때문에 잊혔듯, 구송정도 같은 신세가 됐다. 청평사를 방문했던 선인들의 기록에 꼭 등장하던 구송정은 이제 숲속에서 길게 쉬고 있다.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은 〈산중일기(山中日記)〉에서 “구송정에서 내려가 위와 아래의 폭포와 너럭바위를 감상했다. 무척이나 맑고 기이한 경관으로 산중의 가장 큰 보물이다”라고 적었다. 안석경(安錫儆, 1718~1774)은 〈유청평산기(遊淸平山記)〉에서 “구송대로부터 골짜기에 있는 너럭바위로 옮겨 앉았다가, 한참 지난 후 일어났다”라고 기록했다. 정시한과 안석경의 글은 그들이 머물렀던 구송정이 너럭바위와 연결된 곳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너럭바위 바로 옆 구송정 터로 가니 돌무더기 사이로 풀만 무성하다. 나뭇가지가 만든 그늘 밑에서 쉬다가 눈을 돌리자 폭포가 눈에 들어온다.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겹쳐서 보인다. 두 개의 폭포를 선인들은 이단폭포, 이층폭포, 형제폭포, 쌍폭 등으로 불렀다.

서종화(徐宗華, 1700~1748)의 〈청평산기(淸平山記)〉에서도 두 개의 폭포를 찾을 수 있다.

비로소 구송대(九松臺)에 도착했다. 구송대는 돌을 쌓아 만들었다. 예전엔 구송대 주변에 아홉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는데, 이 중 하나가 작년에 바람에 의해 쓰러졌다. 구송대의 북쪽에 이층폭포가 있다. 아래 폭포는 위 폭포에 비해 한 길 정도 작다. 산의 눈이 막 녹기 시작해 계곡의 물이 막 불어나니, 폭포의 물은 세차게 부딪치며 물보라를 내뿜는다. 흐르는 물소리는 마치 흰 용이 뛰어오르며 큰 소리로 으르렁거리는 듯하다. 두 폭포 사이에 용담(龍潭)이 있는데, 웅덩이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일찍이 용이 이곳에서 숨어 살았기 때문에 이름 지었다.

춘천부사를 지낸 신위(申緯, 1769~1845)는 구송정폭포에 대해 “이 고개에 수많은 소나무 있는데/ 누가 아홉이라 했는가/ 신령스런 곳이라 기이한 변화에 어지러운데/ 폭포는 홀연히 두 군데서 뿜어대네”라고 그려냈다. 신위는 두 군데서 물을 떨어뜨리는 폭포의 모습을 예리하게 포착해서 시를 지었던 것이다.

정약용도 두 개의 폭포를 구분했다. 위에 보이는 폭포를 와룡담폭포라 했고, 아래에 있는 폭포는 구송정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구송정폭포라 불렀다.

하늘은 두 가닥 폭포를 드리웠고 天垂雙練帶
산은 구송정(九松亭)을 내놓았네 山出九松亭
신속함은 신선의 수레와도 같고 飄忽飛仙駕
널리 퍼질 땐 연극 마당 같아라 平鋪演戲庭
급한 소리는 변괴인가 걱정이 되고 急聲愁變怪
남은 힘은 평온해짐을 보겠구려 餘力見調停
시원스러운 바람 숲의 기운이 灑落風林氣
숙취를 완전히 깨게 하는구나 渾令宿醉醒

다산도 신위처럼 구송정폭포의 특징을 놓치지 않고 형상화했다. 두 가닥 폭포라는 것은 두 군데서 떨어지는 폭포의 특징을 알아채서 그린 것이다. 공주굴 옆 폭포를 예전에는 아홉 가지 소리를 낸다 하여 구성폭포라고 하였다가, 최근에 수정하여 구송폭포라고 부른다. 그러나 여러 기록들을 보면 너럭바위 옆에 있는 폭포가 구송정폭포 또는 구송폭포다. 다산과 신위의 시와 정시한, 안석경, 서종화 등의 기록이 알려준다.

권혁진(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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