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여성문학회 회장 송병숙 시인

“하루 대여섯 번씩 신작로를 오르내리는 버스를 눈으로 좇다가 산그늘이 마당 끝 목련나무에 다가와 무등을 태우는 걸 보고서야 엉거주춤 일어서시던 어머니. 공휴일이면 방문을 삐쭉 열기도 하고 말기도 하는 자식들을 기다리느라 지는 해를 바지랑대에 달아 놓고 풀 먹인 무명 빨래처럼 하루를 잡아 늘리기도 하던 문턱. 지금은 헐린 집터 컨테이너 댓돌에 앉아 큰 길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워 무는 퇴직한 오라버니 눈빛이 생전의 아버지 같기도 하고 어머니 같기도 하고”(<문턱>, 송병숙)

봄볕 눈부시게 쏟아지던 날이었다. 이왕이면 좋은 곳에서 만나고 싶다는 시인과 춘천이 한 눈에 들어오는 예쁜 카페로 장소를 정하고, 먼저 도착해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모처럼 미세먼지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 아름다웠다. 또각또각 경쾌한 구두 소리를 내며 그녀가 들어선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는 그녀. 35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시들을 엮어 생애 첫 시집을 낸 송병숙(63·강원여성문학회 회장) 시인이다.

시인에게 ‘문턱’은 그리운 어머니, 아버지가 기다리던 다정한 고향이다. 시인이 나고 자란 서면에서 학교를 갈라치면, 배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배에서 내려도 가깝지 않은 시내였다. 4남매 중 외동딸인 시인을 학교에 보내 놓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해가 지기 무섭게 문턱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어린 딸을 기다렸다.

시인은 말했다. 인생은 문턱을 넘는 일이라고. 문을 열고나서면 펼쳐지는 다른 세상. 그 세상을 살아내고 나면 어김없이 다른 문턱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순간 새로운 문턱을 향해 열정을 다해 달려갔던 그녀는 오래 손에 쉬고 있던 교편을 내려놓고 시인이라는 문턱을 넘었다. 시인이 넘은 문턱은 시인을 보살피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이었고, 먼저 떠나 얼굴을 모르는 형제들이었고, 홀로 맞은 할머니의 임종이었다.


“시인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어릴 땐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림을 잘 그리는 큰 오빠의 영향이었는지, 어릴 땐 화가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어요. 그림을 곧잘 그려 여러 대회에 나가 입상도 하면서 자연스레 화가의 꿈을 꾸었어요.”

부족한 형편은 아니었다. 고집을 부렸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귀한 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밭에 나가 일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며 외동딸이자 맏딸이었던 시인은 어머니의 고단함을 일찍 알았고 그래서 일찍 철이 든 의젓한 딸이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이미 춘천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작은 오빠가 진로 고민을 하던 저에게 국어교육과를 가면 어떻겠느냐고 조언했었죠. 화가 다음으로 가진 꿈이 교사였기 때문에 크게 상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림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늘 품고 있었어요. 대학에 입학해서는 열심히 공부하는 만큼 또 그렇게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즐겁게 대학생활을 했어요. 그림도 그리고, 연극도 하고, 춤도 추고, 노래 부르는 것도 참 좋아했었죠. 그러다 양양중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는데, 그것이 운명이었을지도 몰라요.”

하필 옆 자리 선배 교사가 이성선 시인이었다. 고인이 된 그는 당시 갓 부임한 어린 여교사에게 자작시를 보여주며 시심을 깨워준 은인이었다. 그녀의 글을 본 이 시인은 그녀에게 글이 참 좋다며, 계속 글을 써볼 것을 권유했다. 글이라고는 리포트와 일기밖에 써본 적이 없다는 그녀였다. 어쩌면 중학교 때부터 줄곧 친구가 되어준 일기가 그녀의 밑천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젊은 시절은 늘 불안정했어요. 가슴이 늘 들끓었어요. 뭔가 모를 감정의 소용돌이가 쉼 없이 몰아쳤고, 그런 젊은 나날은 스스로 견디기 참 힘들었어요. ‘나는 무엇일까.’ 그 고민을 쉴 새 없이 하곤 했는데, 시를 쓸 때 유일하게 마음이 고요해졌어요. 들뛰는 마음을 시어(詩語) 하나하나에 꾹꾹 눌러 담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해졌어요. 저에게 시는 종교예요.”

천천히 시를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에 들어간 동인 ‘갈매’에서 그녀는 천천히 숨을 고르듯 시를 썼다. 그리고 82년 12월, 현대문학의 추천으로 시인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다작을 하지는 못했지만, 버거운 삶을 내려놓기 위해 꾸준히 펜을 들었다. 그러다 이듬해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다.

“자연스럽게 시와는 멀어졌어요. 좋은 선생님도 되고 싶었고, 부족하지만 아내로 엄마로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씩 멀어지게 됐죠. 그렇다고 엄마로서, 그리고 아내로서 잘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 돌이켜 보면 일을 우선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많았고, 마음에는 내 아이들과 학교의 아이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어서 가족에게는 많이 소홀했어요.”

‘적어도 선생님을 잘못 만나서 인생을 망쳤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은 선생님이었다. 학교에서 시인은 오직 제자들 생각뿐이었고, 아이들에게 좋은 일이라면 앞장서고 싶었고, 늘 완성하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어른이 된 제자가 찾아와 그녀가 건네 준 편지를 이야기 하며, 그 속의 위로가 자신을 일으켜세웠다는 말을 했을 때는 감사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 두렵기도 했다고. 내뱉은 말 한 마디로 혹시 상처 받은 아이가 있지는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춘천으로 발령 받아 돌아왔을 때 다시 한 번 시가 그녀의 인생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춘여고에서 근무할 때 옆자리 선생님이 누구였는지 아세요? 바로 이영춘 선생님이셨어요. 선생님께서 저에게 시를 보여주셨죠. 어린 교사였던 그때 이성선 선생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천천히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동인 ‘A4’에서 활동을 다시 시작했죠. 1년에 서너 편, 겨우 끊어지지 않을 만큼이었지만, 그 무렵의 저는 제2의 사춘기가 온 듯, 버겁기만 하던 감정이 되살아나기 시작했죠.”

그리고 다시 춘천을 떠났다가 돌아왔을 땐 석사과정에 맞춰 전문직 준비를 할 때였다. 인문계가 아닌 학교에서 조금 여유 있는 생활을 하며 다시 시에게로 돌아왔다.

“전문직을 하면서 오히려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그래서 다시 시에 몰두할 수 있었어요. 첫 시를 선보이고 35년만에 첫 시집이 엮어졌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제 첫 시집이 그렇게 밝지는 않아요.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제 위로 잃었다는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아요. 부끄럽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먼저 떠난 가족들이 떠올랐고, 그 마음이 자꾸 쏟아져 나오더라고요. 이영춘 선생님께서 “보통 첫 시집은 그렇다”고 이야기해 주시더군요.”

닿을 수 없는 기억에 대한 그리움이었을까. 자라는 동안 무언가를 이룰 때마다 그리도 자랑스러워하셨던 부모님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시인의 눈에 물기가 돈다. 할머니와 둘이 있던 날 돌아가신 할머니. 어린 마음에 시인은 할머니의 얼굴에 거울을 대보았다고 했다. 김이 서리지 않은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할머니가 돌아가셨구나’ 실감했던 순간을 잠시 회상했다. 시인의 첫 시집 《문턱》에는 그렇게 시인에게서 떠나간 시간과 시인이 지나온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제 또 다른 문턱을 넘어 시인이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두 번째 시집은 ‘문턱’보다는 밝은 시들로 가득 채워질 거예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순간에 후회는 없어요. 전 언제나 지금의 제가 가장 예쁘고, 행복하니까요.”

40년 교단을 떠나 또 하나의 문턱을 넘어 새로운 시간여행을 시작한 시인의 발걸음을 응원한다.

김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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