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리산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봄비는, 꽃은 또 저렇게 피고 지랄”이었다. 납품해야 할 곳은 열 군데가 넘었고, 매일 수천 권씩 밀려들어오는 책은 책장에 넘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바닥에 수북이 널브러져 있었으니. 꽃구경 가는 인간들이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아이들을 태우고 봄 소풍을 간 대형선박이 침몰했고, 다행히 전원 구조됐다는 뉴스는 그래서 내겐 더 시니컬했다. “ㅆㅂ. 선박 치우고, 수습할라믄 해경들만 x됐네.” 못되고 독한 혀가 뱀처럼 날름거렸다.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오후 1시를 넘어 춘천시민교육문화관 주차장에서 나는 평소에 듣던 FM 라디오가 아니라 육백육십 몇 메가헤르츠로 시작하는 AM 라디오를 듣게 되었고, “아이고. 씨벌. 다 죽게 생겼당께요. 애기덜이 창문에 붙어 있었는디. 해경은 꿈쩍을 안하지라! 아이고, 지미. 큰일 났구만이라.” 현장 연결을 하던 여자 아나운서는 말문이 막혔고, 다급했던 PD는 방송을 중단했다. 그날, 생강나무 꽃과 개나리, 매화꽃은 주책없이 겨울을 밀어내려 몸부림쳤다. 삶과 죽음이 얇디얇은 창문의 이쪽과 저쪽에서 혼재되어 맨 얼굴로 우리에게 생. 중. 계. 되었다. 기억은, 고통이다.

망각

망각은 기억의 건너편에 있다. 오랫동안 이 나라에선 사람이 죽으면 딱 3일을 슬퍼했다. 이유 없는 죽음이란 없을 터이고, 그 슬픔의 무게 또한 사람의 수만큼 계량되어질 테지만. 망각할 줄 아는 인간의 신통방통한 능력 때문인지 사람들은 3일 또는 5일을 슬퍼하고 망자를 잊기로 암묵적으로 얼버무렸다. 비극은 이 지점이다. 기억을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3일의 슬픔만을 강요하는 천박한 얼버무림. 잠수사의 일당이 1백만원이고, 시신 한 구당 5백만원을 얹어 준다던 대리기사 아저씨의 알량한 캐피탈리즘. 서울광장은 모두의 것이 돼야 한다며 단식 중인 유가족에게 pizza를 들이미는 x같은 그 감수성!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내륙의 소도시 범부(凡夫)도 또렷이 기억하는 그날. 2014년 4월 16일을 애써 망각하는 그 자유인들의 망할 놈의 자유! 올림머리를 해도 좋고, 약을 쳐 먹어도 좋다. 슬픔의기억을 망각의 강요로 덮으려는 자. 그가 범인(犯人)이다.

거짓말

치밀하고 방대한 현장조사로 유명한 ‘소설노동자’ 김탁환의 《거짓말이다》(북스피어)는 세월호 사고 당시 실종자를 수습한 민간 잠수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르포르타주 형식의 소설이다. 주인공인 나경수 잠수사의 ‘재판장님께’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의 얼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민간잠수사의 리더 ‘공영우’ 씨의 업무상 과실치사에 대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서사(敍事)의 힘보다 절박함이 글을 떠받치고 있다는 느낌. 이건 세월호 진상규명을 바라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의 절박함으로 비춰진다.

“빛을 삼켜버리는 완전한 어둠, 어둠을 강요하는 어둠, 너무나도 위험한 어둠”으로 상징되는 맹골수도 바다 속의 물질은 “헤드랜턴만 걱정했는데 시야를 0에 가깝도록 만든 것은 바로 제 눈물이었습니다”로 끝맺는 잠수사의 절절함에서 강하게 이입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부유하는 실존적 인간, 세월호 민간 잠수사. 그들의 트라우마와 생채기는 끝내 죽음이 되었다. 맞다. 이 이야기는 잠수사 김관홍의 이야기다.

다시, 기억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나는 수학여행을 떠난 아들을 맹골수도에서 잃은 국민이고, 내 앞에 앉은 사내들은 억울하게 숨진 내 아들을 찾고자 매일 잠수하는 국민이라고. 국민과 국민이 만난 거야. 유가족과 잠수사가 서로 사과를 주고받아서는 안 돼. 오히려 우린 함께 국민을 우롱하고 상처 입힌 자들을 찾고 그들에게 공개 사과를 받아야 해. 정말 머리 숙여 사과할 사람을 찾으려고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라고!”(180쪽)

우리처럼 가진 게 없는 이들에게 역사는 늘 슬프다.

슬픈 역사 앞에는 ‘하루만’, ‘한 시간만’, ‘일초만’이라는 불가역적인 바람을 품는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우린 안다. 협잡과 왜곡으로 가득한 저들의 고차원 방정식보다 1백만 개, 1천6백만 개의 촛불, 304개의 별이 우릴 지켜줄 것을.

 

류재량 (광장서적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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