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기억이 난다. 농사를 처음 접하던 때, 콩을 처음 심어볼 요량으로 재래시장에서 시골할머니가 팔던 싱싱하고 큼직한 콩을 한 바구니 샀다. 거름을 주고 밭을 일구고 정성스럽게 콩을 심었다. 싹이 올라올 때의 신기함, 튼튼한 잎사귀가 무성해질 때의 뿌듯함, 흰 꽃이 필 때의 설렘…. 그리고 그뿐이었다. 콩깍지는 달리지 않았다. 장마가 지나고 여름이 다가도록 잎만 무성했다. 무성한 콩밭에 콩이 한 알도 열리지 않다니…. 그 후에도 여러 번 씨앗을 심을 때마다 혹시나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씨앗을 심으면 씨앗이 되는 열매가 맺히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던 나는 당황했고, 자료를 찾아보면서 이내 F1, F2 종자, 터미네이터 종자 등의 낯설지만 섬뜩한 단어들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때 내가 그려본 세계의 미래는 최근에 개봉된 ‘공각기동대’나 1982년에 개봉된 ‘블레이드 러너’ 같은 곳이었다. 여러모로 이미 돌아갈 수 있는 선을 한참이나 넘어온, 거대기업이 지배하면서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고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무너진, 오염된 식량과 파괴된 환경으로 인해 각종 이름 모를 질병과 기형이 난무하는, 그 파괴된 인간의 신체를 대신하는 사이보그와 각종 기계, 그리고 하나의 인종, 하나의 문화만이 존재하는 우울하고 어둡고 기괴한 SF영화를 연상케 하는 그 어떤 것이었다.

재래종, 토종 등의 단어를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미 아이들을 인스턴트 음식에 뼛속까지 길들이게 해 놓고 이제 와서 나만 오래 살겠다고 재래종이니 토종이니 찾는 것이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독수리 5형제 같이 지구를 지키자고 하거나 세상을 더 낫게 만들자는 대의에 쉽게 감동을 받는 성격 탓에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토종농사학교를 통해 알게 된 분들의 도움으로 바리바리 모은 토종씨앗들을 나누는 행사를 열었고, 춘천토종종자모임이라는 작은 모임도 시작되었다.

그런데 봄이 오듯이 붐이 왔다. 어느덧 토종도 붐이 일고 있다. 예전에 ‘원조’라는 말을 너도 나도 간판에 붙인 시절이 있었듯이, 토종닭, 토종돼지, 토종농사, 토종꿀, 토종건강촌 등의 간판은 이제 어디 가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2000년대부터 일어난 유기농과 웰빙well-being 바람, 심심찮게 등장하는 먹거리 장난질에 대한 분노와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열망, 뭐 그런 것들의 표현이겠다. 얼마 후면 ‘원조 토종’이라는 간판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토종의 의미의 기저에는 불이사상이 있다.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하나(生死不異)이며 색(물질)과 공(비물질)은 다르지 않다(色不異空)고 한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으며, 깨달음과 번뇌가 다르지 않고, 땅과 하늘이 다르지 않다. 중국의 불전(佛典, 노산연종보감 “廬山蓮宗寶鑑, 普度法師”, 1305년)에서 이 사상을 땅과 그 안에 사는 사람을 연관시켜 ‘신토불이(身土不二)’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신토불이를 고서인 《향약집성방》에서는 “대체로 백리만 돼도 풍속이 같지 않고 천리가 지나면 풍속이 다르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신토불이는 그 땅에서 나는 음식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그 지역의 삶의 방식, 풍속, 문화 등으로 확대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토종, 토속은 먹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문제다. 그리고 문화는 우리의 정체성과 연관되어 있다. 토속을 외치면서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비단 건강한 먹거리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문화와 이에 따른 우리의 정체성이다. 풍토에 맞는 문화와 우리의 삶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불이(不二)문화의 회복이다. 생물학적으로 말한다면 수천 년 동안 축적되어 온 우리의 유전정보에 맞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오죽하면 90년대 가수 배일호는 ‘신토불이’라는 노래에서 이렇게 외쳤을까. “너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 이 땅에 태어난 우리 모두 신토불이~”

김태민 (풀꽃마을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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