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노래 속의 민중사 ⑫ - < 단장의 미아리 고개 >
‘역사는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의 싸움’이라고 했다. 그래도 우리 역사는 좀 심했다.
특히 우리의 근현대사,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겪은 삶은 많이 아팠다.
할아버지는 어떤 아픔을 겪었을까. 아프면 노래를 한다는데 아버지는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홍대 앞 클럽에서 밴드가 노래한다. “미아리 눈물고개 갈까 말까 갈까 말까…♪” 관객들이 까르르 웃는다. 나는 웃지 않았다. ‘충고를 기분 나빠하는 인자’가 인간 본성에 있음을 아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도 알게 되겠지. 역사에 눈 뜨고 삶의 무게 약간을 덜어낸 것은 나도 나이가 들어서였으니. 이 녀석들도 철이 들고, 세상에 대해 알고 나면 그때야 비로소 ‘노래’를 하리라.

진나라 환온(桓溫)이 촉을 치러 배 타고 가던 중 병사가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 왔다. 어미 원숭이가 강기슭을 따라 백 여리를 따라와서 배안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창자가 도막도막 끊어져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끊어진 창자’라는 ‘단장’(斷腸)이 유래한다.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꽃단장(丹粧)하고 단장(短杖 지팡이) 짚고 산책하는 언덕길이 아니다. ‘눈물고개’다.

서울 토박이인 어머니는 미아리고개를 넘어오는 저들을 보았다고 하셨다. 돈암동 아저씨 댁에 가는데 “실실실~” 쇳소리를 내며 탱크가 미아리고개를 넘어왔단다. 그리고 석 달 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으로 저들은 후퇴한다. 많은 사람을 끌고 미아리고개를 넘어갔다. 전쟁에서 사람은 전투력이다. 지식인 두뇌는 쓸모가 많다. 사람들이 철사줄로 묶여 맨발로 끌려갔다. 미아리고개를 넘고 의정부를 지났다. 다급해진 저들은 끌고 가던 이들을 학교운동장에 모아놓고 따발총을 갈겼다. 우물에 거꾸로 처넣었다. 이를 알지 못하는 가족들은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자! 노랫말에 담긴 동영상을 보자.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해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 반야월 사/ 이재호 곡/ 이해연 노래

피아(彼我)가 모호한 전쟁이었다. 왜놈이나 오랑캐와 싸운 게 아니다. 박 서방이 개똥아범을 쏘았다. 운전수가 조수를 쏘았다.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은 서로를 쏘았다. 작은아버지, 외삼촌, 큰 이모, 막내는 이쪽. 아버지, 큰형, 작은 외삼촌, 경숙이 누이는 저쪽이었다. 개울 건너 방앗간집 사정도 비슷했다. 아픔을 겪지 않은 이가 없다. 미아리고개에 살던 작사가 반야월 선생은 전쟁 중 딸을 잃었다.

이 노래는 전쟁 후 1957년(?)에 발표됐다. 이 곡 역시 우리 옛 가요가 그러하듯 전주와 간주가 일품이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을 연상시키는 비극적 서주 6마디에 이어, 전주 선율이 나타난다. 민족정서를 지닌 멜로디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을까? 언제부터인가 서주는 잘 연주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부분을 주목한다. 작곡가 이재호 선생의 거인적 역량이 나타나기 때문.

아! 간주는 얼마나 가슴을 파고드는가. 나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 인류가 만든 멜로디 가운데 이 선율을 가장 우위에 둔다. 슬프디 슬픈 16마디 간주 선율은 창자가 끊어진 아픔을 어루만져 준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선율이다. 그 위로 대사가 흐른다. “여보 당신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시나요. 어린 용구는 오늘 밤도 아빠를 그리다가 이제 막 잠이 들었어요. 꼭 살아만 돌아오세요. 네? 여보! 여보!”
참 바보 같은 역사다.

 

김진묵 (음악평론가)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