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어, 그래요? 근데 나는 모르겠어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근데 정말 이상한 일인 것 같아요. 난 이유를 알고 싶어.”

성준:“이유가 없죠.”
보람:“응?”
성준:“그러니까 이렇게 이유 없이 일어난 일들이 모여서 우리 삶을 이루는 건데, 그 중에 우리가 몇 개만 취사선택해서 그걸 이유라고, 이렇게 생각의 라인을 만드는 거잖아요?”

영화 ‘북촌방향’의 한 장면이다. 보람은 그날 만난 사람들이 모두 영화계에 종사한다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며 이러한 우연의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우리도 보람처럼 늘 사건의 이유를 찾는다. 사실은 성준의 말처럼 이유를 만들어낸다. 우리 삶은 이유 없는 일투성이인데 말이다. 왜일까?

이유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건은 어쩌다 발생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원인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원인을 알고 나야 현재의 사건이 정당한 것 같고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 그게 ‘논리적’이니까. 논리적 정합성은 우리에게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안정감을 부여한다.

논리학의 대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목적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따르면 과거의 사건이 오늘의 사건의 원인이 되었듯, 내가 지금하고 있는 행위는 미래의 특정한 사건을 이끌 것이다. 하지만 정말 내가 의도한 대로 미래가 펼쳐지는 일이 얼마나 자주 있었던가? 성준과 보람의 대화를 좀 더 보자.

성준:“사실 대강 숫자만 잡아도 수없이 많은 우연들이 뒤에서 막 작용을 하고 있는 거거든요.”
보람:“그렇죠. 그 전의 우연들을 다 추적할 수는 없는 거죠. 그리고 그 우연들의 또 전의 우연들이 있는 거잖아요.”
성준:“그러니까 현실 속에서는 대강 접고 반응하고 갈 수밖에 없지만, 실체에서는 우리가 포착할 수 없이 그 수없이 많은 것들이 막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거거든요. 아마 그래서 우리가 판단하고 한 행동들이 뭔가 항상 완전하지 않고 가끔은 크게 한 번씩 삑사리를 내는 게 그런 이유가 아닌가 제가 생각을 해보는데.”

이들의 말처럼 원인에는 원인이 있고, 또 그 원인에도 원인이 있다.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원인들의 복잡한 작용이 오늘을 구성하고 있고, 그렇게 구성된 오늘이 미래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순한 수준의 원인과 결과의 정합성은 우리 삶 전체에는 적용될 수 없다. 그럼에도 ‘논리적’인 우리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선택해서 그럼직한 인과관계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우리의 인지밖에 있는 원인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니체는 필연으로 설명한다. “자연에는 오직 필연성이 있을 뿐이다. 자연에는 명령하는 자도, 복종하는 자도, 위반하는 자도 없다. 목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연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목적의 세계에서만 ‘우연’이라는 단어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 <즐거운 지식>, 109절

목적을 제거하면 필연만 남는 것이다. ‘필연의 세계’. 혹 이 말에 인간의 의지가 한없이 약해지는가? 목적이 없는 세계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니체를 따라보자. “나의 행복. 추구하는 것에 지치게 된 이후로 나는 발견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역풍을 만난 이후로 어떤 바람이 불어도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위 책, 전주곡 2절)’

목적지가 사라지면 항해 그 행위 자체에 더 집중하게 된다. 우리의 눈이 머물러야 하는 곳은 저 먼 목적지가 아니라 지금 내가 타고 있는 배의 돛이고, 함께 탄 사람들이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즐겁게 항해하는 것뿐이다. 다가오는 역풍이 필연이라면 이를 기꺼이 맞이하고 항해의 기술을 익히면 된다. 다음 역풍을 사뿐히 넘을 수 있도록. 그래서 항해가 계속 즐거울 수 있도록.

홍정희 (강원인문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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