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프랑수아 를로로의 베스트셀러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이란 책을 보면 진정한 행복의 첫 번째 조건으로 남과 비교하지 않을 것을 뽑는다.

사실 우리나라만큼 사회 전체가 남과의 비교에 익숙한 나라도 드물 것이다. 초등학교 체육대회부터 청군·백군을 나누어 승부를 겨루고, 심신의 건강을 위한 어른들의 조기축구에서 조차 승부에 집착한 나머지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광고에서는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이웃집 차와 가전제품 때문에 기죽지 말고 무리해서도 사라고 자극한다. 성적이 좋지 않았던 아이가 갑자기 좋은 성적을 받아오면 부모는 아이가 열심히 했다고 칭찬하기보다 그 성적이 반에서 몇 등인가를 먼저 물어본다. 언제부턴가 엄친아·엄친딸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사용되지만, 사실 이 단어들은 아이들의 불만과 원망으로부터 시작된 말이다. 아이들이 부모님과의 대화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친구와 비교되는 것이고, 나를 힘들게 하는 존재가 바로 엄마 친구 아들과 딸이었던 것이다.

대통령이 바뀌고 새 정부가 들어섰다. 새로운 대통령은 분명 지난 정부와 다르게 여러 곳에서 변화를 이끌 것이며, 교육분야에서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교육제도와 정책이야 국가 백년대계이니 갑작스러운 변화가 바람직하지는 않겠지만, 교육현장의 가치관 변화는 꼭 이루어졌으면 한다. 사회의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함께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초등학교에서 잠깐 일했을 때 그들의 교육방식에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그들은 초등학교 때는 교과공부보다 ‘엠퍼씨(empathy: 공감 능력)’를 가르친다. 아이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게 해줘야 한다. 아이들의 피부색과 언어, 신체가 다르고 능력이 제각각이기에 경쟁과 비교보다는 공감과 배려의 중요함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사회학자 오찬호 씨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을 읽고 깊이 공감한 적이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청년들이 가진 신념을 ‘능력에 따른 차등대우가 정당하다’라는 명제임을 지적한다. 청년들의 이런 태도는 흔히 비정규직과 정규직 대우를 두고 나타나는 갈등에서 잘 드러난다. KTX 비정규직 승무원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회사를 상대로 소를 제기한 것이 그 예다. 저자는 ‘동일한 노동에는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하며, 이것이 평등이며,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는 정당한 일’이라는 대답을 학생들에게 기대하지만, 학생들은 “노력하지 않고 공사에 들어가 비정규직에게 왜 정규직 전환을 해줘야 하는 것이죠?”라고 묻는다. 우리는 능력에 따른 차별을 아주 당연한 것임을 학습 받아왔다. 하지만 저자는 학생들의 이런 태도가 “자기 계발의 신화”와 “경쟁” 속에서 학습된 것이라 이야기한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성장과 개발시기의 이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적인 양질의 일자리가 적고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평범한 중산층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시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무조건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남이 갖고 있는 것을 나도 가져야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바른 교육일까?

물론 삶에는 어려움도 있고 고통도 있다. 하지만 불필요한 경쟁과 욕심을 통해 눈앞의 행복을 잃어버리고 살 필요는 없다. 우리는 많은 것을 갖지 못해도, 남과 다른 삶을 살아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자기 삶의 주인인 아이들이 스스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육의 참된 역할이 아닐까?

이원영 (춘천시청소년수련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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