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던 매니큐어가 화장품으로 등장하고 손톱예술이 하나의 직업으로 등장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여인네들의 손톱화장을 담당했던 것은 봉선화였다.

전설에서 순결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비운의 여인네의 이름이었던 봉선화는 장독대와 담벼락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었다. 이 봉선화를 손톱에 물들이는 자연화장품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봉선화가 가지는 독특한 약성 때문이다. 요리사들이 고기요리를 할 때 봉선화 씨앗을 넣으면 고기와 뼈가 연해지고 먹기가 좋다고 한다.

뼈에 침투해 연하게 하는 성질 때문에 한문으로는 투골화(透骨花)라고도 불렸다. 봉선화는 줄기와 잎을 나물로 먹을 뿐만 아니라 거의 만병통치약에 가까울 정도로 뇌질환과 부인병, 통증과 염증 등의 여러 가지 질환에 약으로 사용되며, 해독과 항생제 작용도 한다. 봉선화를 장독대 주위에 심었던 이유 역시 봉선화가 벌레를 물리치는 독특한 효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 어느새 봉선화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고, 문득 찾아보니 외국에서 들어온 다양한 꽃들이 실내와 실외에서 크고 있지만 봉선화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요시가와 히로미쯔의 책 《어이없는 진화》를 보면, 지구상에 지금까지 다섯 번의 대멸종이 있었고 그로 인해 지구상의 생물 99.9%가 멸종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멸종의 원인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도태된 것은 아니었다. 히로미쯔는 생물의 멸종이 주로 그 생물이 살고 있는 지역환경의 급격한 변화나 자연재해 등의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제국주의나 신자유주의의 관점인 ‘적자(適者)’에 의해 진화한다는 ‘발전적 진화론’이 아니라 진화는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다윈의 무정향적 진화론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이제 지구는 다시 여섯 번째의 멸종이 진행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매년 2천700여종이 멸종하고 있고 2030년이면 현재의 생물종 중 25%가 소멸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여섯 번째 멸종의 원인은 기존의 다섯 번째까지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자연재해나 무정향적인 멸종이 아니라 사람에 의한 멸종이고 분명한 방향이 있는 멸종이다.

인간은 안정된 식량확보를 위해 꾸준히 밀, 쌀, 옥수수를 중심으로 종자개량을 진행했고 그 결과 현재 전 세계 음식의 60%가 이 3대작물에 의존하고 있다. 식량의 안정적인 확보와 다양성을 맞바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밀이나 쌀 안에서도 인간의 입맛이나 수확량에 맞추어 선택적으로 멸종이 진행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1천여 종에서 최소 수백 종의 벼 품종이 재배되었으나 현재는 10여종 이내로 줄어들었다. 한국의 토종작물은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80% 가까이가 소멸되었다. 상업이 농사의 주목적이 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이는 인간의 선택에 의한 멸종이다. 작물은 자연에서 자라는 잡초와 다르다. 작물의 지속가능성은 철저히 인간에게 달려있다. 인간이 작물을 재배하지 않으면 작물은 멸종한다. 즉, 작물의 멸종원인은 인간의 선택이다.

오는 5월 19일에 개관하는 춘천토종씨앗도서관은 바로 이와 같은 멸종을 방지하고 생물, 특히 작물의 다양성을 지켜내기 위한 작은 씨뿌림이다. 춘천토종씨앗도서관의 꿈은 그리 화려하지 않다. 춘천 인근지역에서 아직 멸종하지 않은 토종작물씨앗을 수집하고 지역사회 주민에게 보급하는 것과 그렇게 채종한 씨앗들을 다시 재보급하는 것이다. 인간의 선택으로 인해, 즉 재배하지 않아서 멸종되고 있는 토종작물을 다시 재배라는 선택에 의해 보존하고 확산시키려는 것이다.

작은 일이라지만 많은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가 필요하다. 이를 운영하기 위한 자원봉사자들과 토종씨앗을 재배하고자 하는 주민들의 참여가 그 핵심이다. 춘천지역의 생물의 다양성은 우리 춘천시민의 선택적 재배에 의해 달라질 것이다.

 

김태민 (춘천토종씨앗도서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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