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오 차상찬 선생(1887∼1946)

차상찬이 어떤 인물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언론계, 종교계, 문화계뿐만 아니라 학계와 문단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고, 성과 또한 다채롭기 때문이다. 그는 《개벽》, 《별건곤》, 《혜성》 등 10개의 잡지 창간에 참여하면서 기자와 편집인, 그리고 발행인이라는 복수의 역할을 담당했고, 역사와 민속 분야에 뛰어난 식견을 지닌 필자로서 10여권의 단행본과 500편 이상의 글을 남겼으며, 작가로서도 시, 소설, 동화, 수필 등을 100여 편 발표했고, 또한 천도교인으로서 민중계몽운동과 문화운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차상찬은 언론사와 문화사, 그리고 문학사에 주목할 만한 족적을 남겼지만 아직까지 연보와 저작 목록조차 제대로 작성되지 않고 있어 전모를 알 수는 없다. 다만 밝혀진 몇 가지 행적을 중심으로 그의 면면을 조명해보기로 한다.

차상찬은 1887년 2월 12일 춘성군 신동면 송암리(현 춘천시 송암동)에서 부친 차두영과 모친 청주한씨 사이의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1946년 3월 24일 59세의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유소년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했지만, 18세에 보성중학교에 진학해 근대교육을 받고 1913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했다. 그는 전통과 근대교육을 충실히 받으면서 한학에 조예가 깊고 한문 실력이 뛰어났으며, 역사·민속·문학·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지성인으로 성장했다.

차상찬은 1904년 형들을 따라 천도교에 입교하면서부터 활발한 사회활동을 시작한다. 갑진혁신운동(1904), 천도교중앙총부 사범강습소(1910), 천도교 청년회(1919), 개벽사 설립(1920), 어린이날 제정(1922)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민족운동과 문화운동에 깊숙이 관여하고, 관동학회와 조선어문회에도 관계하면서 활동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922년 개벽사 정경부 주임을 맡으면서 차상찬은 수차례 압수, 삭제, 정간, 판매금지 등에도 불구하고 《개벽》 발행에 혼신의 힘을 쏟는 동시에 일제당국의 언론탄압에 저항하는 활동을 이어간다. 1924년 23개 단체가 모인 ‘언론집회압박탄핵대회’에서 실행위원으로 선출되고, 1925년 4월 15일부터 사흘 동안 열린 ‘전조선기자대회’에서 서기를 맡아 언론자유를 위한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는 사실은 그가 당시 언론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잘 말해준다.

1926년 8월 《개벽》이 강제로 폐간되자 그는 《별건곤》(1928), 《혜성》(1931) 등을 잇달아 창간해 발행 겸 편집인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신여성》(1931)의 발행 겸 편집인까지 떠맡아 개벽사의 주간으로서 잡지발행을 책임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시로 총독부로부터 소환장을 받고, 강제연행과 구금 등 고초를 겪었다. 당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에 차상찬과 관련된 ‘불허가 압수 및 삭제 출판물 목록과 기사’가 총 100건에 이른다는 사실은 그가 처했던 엄혹한 상황을 입증해준다.
또한 차상찬은 여러 잡지와 신문의 주요 필진으로 활약하면서 사유의 지평을 넓혀 나간다. 차상찬이 발표한 최초의 글은 1910년 《천도교회월보》 1권 2호부터 8호까지 6회에 걸쳐 연재한 〈무기화학〉이다. 이후 그는 언론, 역사, 민속, 문학,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청오(靑吾), 취운생(翠雲生), 강촌생(江村生), 수춘산인(壽春山人), 관상자(觀相者) 등 35여 개에 이르는 필명으로 발표한다.
요컨대 차상찬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언론인이자 여러 잡지를 창간한 잡지계의 선구자다. 또한 훌륭한 문인들을 등용시킨 유능한 편집인이고, 역사와 민속 분야에 조예가 깊은 기고가일 뿐더러 여러 편의 문학적인 글을 발표한 작가이며 동시에 민족운동에 헌신한 종교인이기도 하다.

정현숙 (강원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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