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노래 속의 민중사 ⑬ - < 굳세어라 금순아 >
‘역사는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의 싸움’이라고 했다. 그래도 우리 역사는 좀 심했다.
특히 우리의 근현대사,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겪은 삶은 많이 아팠다.
할아버지는 어떤 아픔을 겪었을까. 아프면 노래를 한다는데 아버지는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통일을 눈앞에 두고 압록강을 행해 진격하던 어느 날, 포로를 잡았다. 우리말로 심문할 수 없었다. 중공군이었다. 국공내전(國共內戰: 중국 국민당과 공산군의 싸움)으로 전투경험이 많은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이다. 11월 1일, 소련 제트기(Mig-15)가 나타났다. 중공군으로 위장했다. 유엔 상임이사국인 소련이 유엔군을 공격하는 모양새를 감추기 위한 것. 11월 8일, 단둥(압록강 하류의 중국도시) 상공에서 미군제트기(F-80)들이 불을 뿜는다. 소련 전투기 한 대가 격추된다. 항공전 사상 최초의 제트기 공중전이다.

중공군의 게릴라전, 야간기습, 인해전술 등으로 전선은 다시 남하한다. 12월 4일, 서부전선의 미8군은 평양을 내어준다. 동부전선 원산지역이 중공군에게 넘어간다.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은 퇴로가 차단된다. 유엔군은 흥남에서 부산으로 해상 철수작전을 실시한다.

영하 27도 맹추위에 눈보라가 몰아쳤다. 흥남부두는 때 아닌 인파로 가득찼다. 부엌 아궁이, 산 속 동굴, 계곡 등 은신처에 숨어있던 사람들이다. 30만 인파였다. 알몬드 미 10군단장은 이들의 승선을 거부한다. 물자를 실어 나르기도 벅찬 상황. 1군단장 김백일 장군과 현봉학 통역관이 알몬드 장군을 설득한다. “피난민을 버리고 가느니 차라니 우리가 걸어서 후퇴하겠다.” 폭약과 차량 등 일부 물자를 포기하고 최대한 피난민을 실었다. 12월 15일부터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까지 열흘간, 193척 선박에 10만명이 배에 올랐다. 문재인 대통령 부모도 있었다. 다섯 명의 아기도 태어났다. 24일 14시 36분, 마지막 배가 출발하며 항구에 남은 군수물자를 폭파한다. 전사에서는 이를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한다. 이튿날 성탄절 아침, 중공군 27사단이 흥남을 점령한다. 결국 1951년 1월 4일, 서울을 포기하고 평택-삼척선까지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1·4후퇴다.

‘어머니! 저 먼저 갑니다.’
‘어디로 가냐?’
‘부산이요.’
‘부산? 그랴. 어서 가라’
‘어머니도 바로 따라 오세요’


가족이 흩어진다. 그러나 가보지도 않은 부산 어디서 만난단 말인가? 그들은 말로만 듣던 영도다리에서 만나기로 한다. 하루 두 번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다리가 들린다는 영도다리. 영도다리는 이산가족을 찾는 자리가 되었다. 고향사람을 만나면 어머니, 아내, 막내의 소식을 물었다.
영도다리 위에 초승달이 외로이 떴다. 오늘도 금순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움막으로 돌아간다. 그리움은 죽음보다 깊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보았다. 금순아 어디로 가 길을 잃고 헤메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남북통일 그날이 오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추어보자
- 강사랑 사·박시춘 곡·현인 노래(1953)

김진묵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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