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두 번, 한 중학교의 학생들을 만난다. ‘아카펠라’라는 이름으로 수업이 진행되지만 나의 정체성은 치료사이기에 ‘아카펠라’라는 도구를 활용할 뿐,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한 기술을 가르치는 것 이상으로 아이들의 감정상태를 관찰해 필요에 따라 감정의 증폭, 감소, 전환을 유도하는 데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인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소리, 사용하는 언어, 그리고 목소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감정상태, 감정적 봉쇄, 신체적 폐쇄, 신체적 편안함이나 불편함 등 많은 것들을 제공한다(Austin, 1999b).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관찰하면 현재의 욕구가 보이고, 목소리의 크기나 빠르기, 음색 등을 관찰함으로써 현재의 감정상태를 읽을 수 있다.

성인이 되면 그러한 내면을 정교하게 감추기도 하지만 나이가 어릴수록 목소리를 통한 자기표현은 가감 없이 드러나게 되어있고 나는 또 아이들이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그때 해야 할 일은 그 감정을 읽어주는 것 정도면 충분하다. 민감한 아이들은 읽어준 감정에 살을 더 붙이거나 수정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잠깐이나마 다시 살핀다. 조금 둔한 아이들은 ‘그런가?’ 하며 머리를 긁적이고 말기도 한다. 부러 감정을 확대해석해 보기도 하는데 발끈하는 녀석도 있고 그저 참는 녀석도 있다. 그러고 나면 기분이 어떤지 다시 물어 사과를 하기도 해야 한다.

얼마 전 있었던 일이다. 작은 소리부터 큰 소리까지 다양하게 낼 수 있어야 볼륨을 스스로 체크할 수 있고 조절할 수 있다는 설명을 붙인 뒤 다 함께 ‘소리 지르기’를 유도했다. 노래를 잘 하기 위한 방법인 양 제시하지만 보통은 ‘해소감’을 주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다. 어른의 허락을 받고 정당하게 질러대는 소리, 안전한 환경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발산할 수 있겠는가.

많은 아이들이 신이 나서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지만 부끄러워 얼굴만 빨개지는 학생도 있었다. 여러 차례 반복하며 그 부끄러움을 벗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려 애를 쓰던 중, 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대답을 한참 기다려야했다. 싫은걸 억지로 시켰나보다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다 울고 난 뒤 아이의 대답은 의외였다. “소리가…나지를…않아요. 저도…크게…소리치고…싶은데…그게…되지를…않아요.”

꺼이꺼이 넘어가는 소리가 더 커서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바짝 세우고 들었다. 내가 들은 말이 맞는지 다시 되물어 아이 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천천히 그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평소 그 아이의 목소리를 떠올려 보아도 들릴 듯 말 듯 속삭이기에 할 말이 있으면 늘 아주 가까이에 다가와 말을 하던 녀석이다. 어쩌면 한 번도 소리쳐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부모에게도, 동생들에게도, 친구에게도…. 그렇다고 소리치고 싶던 순간이 없었을 거라고 어찌 단정할 수 있을까. 해보지 않은 것을 하려니 마음도 많이 불편했겠다. 하고 싶다는 욕구와 할 수 없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지를 못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저도 소리를 지르고 싶어요”라며 명확하게 자신의 욕구를 인식했다는 것이.

권위라는 이름으로 억누르고, 규율이라는 이름으로 억누르고, 배려나 예의라는 이름으로 억누른 우리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된 사람, 된 사회를 만들겠다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빼앗은 어리석은 결과를 인정하게 된다. 참는 것이 미덕인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억압의 옷을 입었다. 인정하면 나아진다. 그러면 되지 않을까.

우리가 성장하고 자기 자신이 되어감에 따라 목소리는 변화를 반영할 것이다.
 

이진화 (음악심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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