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부사를 지낸 박장원(朴長遠: 1612 ~1671)은 <유청평산기(遊淸平山記)>에서 이렇게 말한다.

“춘천의 청평산은 본디 소봉래로 불렸으니 관동지방에서 명산이다. 그러나 온 나라에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단지 산수가 뛰어나고 기이하다는 것 때문이겠는가? 예로부터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 머물러 살았기 때문이다. 고려조에는 이자현(李資玄), 이조에는 김시습(金悅卿) 같은 이가 있으니, 전기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들의 고결한 기풍과 뛰어난 운치는 지금까지도 듣는 사람들을 흥기시킬 만하다. 이는 진실로 다른 산에서는 자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청평산이 전국에 널리 알려진 이유는 경치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뛰어난 인물이 거처했기 때문이었다.

문벌귀족 출신으로 탄탄대로를 걷던 이자현은 1089년에 임진강을 건너면서 다시는 개성에 들어가지 아니하리라 맹세했다. 예종(睿宗)이 두 번이나 차와 향과 금으로 수놓은 비단을 특별히 내리며 대궐에 들어오라고 명했으나 결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자현은 채소 음식과 누비옷으로 검소와 절제, 청정을 낙으로 삼으며 선동식암(仙洞息庵)에서 생활했다. 홀로 앉아서 밤이 깊도록 자지 않기도 했으며, 반석에 앉아서 하루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입정(入靜)했다가 7일 만에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1125년에 “인생의 목숨이란 덧없는 것이어서 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는 것이니, 부디 슬퍼하지 말고 도에 정신을 두어라”라고 말하고 마침내 입적했다. 산에 거주한 것이 37년이었다.

다산은 청평사에 누워 이자현의 삶을 떠올렸다. “후비의 권세 빙산 같음을 이미 알고/ 담장이 풍전등화 같음을 미리 헤아려/ 고위 벼슬 인끈 풀고서 베옷을 걸치고/ 진기한 음식 버리고 푸성귀만을 먹었네.” 이자현의 고모 세 사람은 문종(文宗)의 비였고, 사촌형 이자겸의 딸은 예종(睿宗)의 비가 되었다. 이자현이 젊은 나이에 청평산에 들어온 것은 이와 같은 친척들의 농단을 꺼리어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다산도 이자현의 이와 같은 생각과 행동이 인상적이었고, 청빈한 삶의 태도는 감동적이었다.

시는 이어진다. “숭산의 소림사에 불자가 된 게 애석하고/ 청성(靑城)처럼 주역 안 배운 게 한스럽지만/ 작은 티가 흰 패옥을 다 가리지 못하고/ 땅벌레를 고니에겐 비할 수 없네.” 이황은 “작은 흠을 가지고 흰 패옥을 가리지 말라”며 이자현의 행적을 기린 바 있다. 다산도 기본적으로 같은 입장이다. 그러나 이자현이 불교에 빠진 것을 애석하게 여기면서, 유학의 경전인 주역을 배우지 않은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유학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비판을 한 것이다. 일민(逸民)이 되길 꿈꿨으나 어디까지나 유학의 범위 안에서의 일민이었다.

다산은 다음 날 시를 흥얼거리며 춘천으로 향했다.

소 타고 돌길 십 리를 돌아나와 石逕騎牛十里廻
등나무 헤치자 신선 세계 열리네 壽藤披豁洞天開
맑은 강 한쪽에 일렁이는 물은 澄江一面漣漪水
청평산 폭포에서 내려온 물이네 曾作淸平瀑布來


※ <정약용을 따라 북한강을 걷다>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함께 유람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