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스펙트 박승훈 대표

지난해 봄. 춘천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이 ‘뮤지션스데이’를 열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총선 투표일 당일이었다. 바람이 거셌던 날로 기억된다. 투표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공지천을 향했다. 조금 늦게 도착한 탓에 이미 공지천 의암공원은 음악으로 가득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무대 앞에 도착하니 세찬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돗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앉아 있는 시민들이 눈에 들어온다. 한 청년 음악가가 ‘바람도 많이 부는 오늘 같은 날, 우리 공연을 봐주러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너스레를 떨며 음료를 나눠주고 있었다. 뒤이어 올라온 키가 큰 가수. 그의 노래를 듣는 순간, ‘노래를 잘 하는 가수구나’ 생각을 넘어 ‘노래를 위해 몸을 제대로 연주하는 연주자구나’ 싶었다. 무대 위에서나 무대 밖에서나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러던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뮤스펙트’라는 레이블(Label)을 차렸단 소식을 전해왔다. 춘천지역을 기반으로 한 젊은 크루(Crew)들을 위해 맏형으로서 기꺼이 울타리 역할을 맡았다는 소식이었다. 춘천에서는 처음 만들어진 레이블이다.※크루(Crew)가 순수 동호회라면, 레이블(Label)은 회사의 틀을 갖춘 것을 말한다.

태어났을 때 그는 청각이 발달되지 않은 상태였다. 몸이 약했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이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귀한 아들의 선천적 청각장애는 아버지에게도 큰 충격이었을 거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그의 귀에 헤드폰을 씌우고, 밤낮없이 음악을 들려줬다. 기적처럼 한 쪽 귀의 청각이 돌아왔다. 그러나 한 쪽 귀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음악을 하게 됐어요. 집에 있던 아버지의 기타로 열한 살 때부터 기타를 독학하고 중학교 때 처음으로 작곡을 했어요. 고등학교 땐 밴드를 만들어 음악활동을 계속했는데, 아들이 음악을 하는 것을 탐탁하지 않게 여기셨던 어머니가 반대를 심하게 하셨어요. 그 땐 공부도 음악도 다 포기하고, 그저 반항하는 마음으로 지냈는데, 비슷한 상황에서 지방으로 대학을 갔던 선배를 만나 근황을 묻다가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던 거죠.”

서울에서 태어나 음악을 반대하는 어머니를 피해 춘천으로 대학을 진학했다는 박승훈(45) 씨.

“아버지가 청년이었을 때, 클럽에서 기타연주를 하셨다고 해요. 제가 태어나기 전에 음악을 놓았기 때문에 저는 나중에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집에는 아버지가 직접 제작해 연주하시던 기타가 있었어요. 그렇게 좋아하던 음악을 내려 놓으셨던 것은 어머니의 반대 때문이었다고 해요. 음악과 자신 중 한 가지를 택하라는 어머니 말에 아버지는 두 번 망설이지도 않고 음악을 그만두셨대요.”

음악을 포기하고 지방으로 대학을 간 선배는 오히려 그곳에서 동아리 활동을 통해 음악을 계속하고, 대학가요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선배의 행보는 고스란히 그의 목표가 되었다. 부랴부랴 내려놓았던 공부를 시작해 강원대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입학해 제일 먼저 했던 것이 바로 동아리에 들어가는 거였어요. 처음엔 MIC에 들어갔는데, 메탈을 하더라고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친구가 ‘울음큰새’라는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저에게 추천을 하더라고요.”

1994년 대학가요제 지역예선에 나가 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큰 병에 걸리셨고 어머니를 위해 평일에는 노래로, 주말에서는 화물 상하차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 돈을 벌었다. 재발을 이겨내지 못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참 힘이 들었을 때 성당에서 아내를 만났다.

“음악이 좋은데 음악을 하며 가정을 지키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예술이라는 것이 많은 분들도 그렇지만 돈이 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기 위해 나를 사랑하는 가족을 힘들게 할 수는 없었죠.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오래 연주해오던 통기타를 잠시 내려놓고, 서울로 올라가 1년 동안 베이스 기타를 배웠어요. 정말 다행인 것은 연주하고 노래하는 재능처럼 저에겐 누군가를 가르치는 재주가 있었던 거예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춘천에서 서울까지 1년 동안 통학을 하며 열차 안에서 화성학을 공부했다. 공부를 마친 후 강원대 평생교육원에서 실용음악 강의를 했다.

“학교 다닐 때 교수님들한테 많이 혼났었거든요. ‘음악 하는 놈이 왜 생물학을 한다고 여기 와 있는 거냐’고요. 그랬던 분들을 대학에 가서 다시 만났을 때 ‘박 선생’이라고 불러 주셨는데 정말 뿌듯하더라고요. 그때 음악 한다고 수업 제대로 안 듣던 말썽쟁이 학생이 그래도 음악으로 뭔가 이루고 돌아 와, 인정을 받은 느낌이었어요.”

춘천을 떠나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그였다. 무엇보다 이곳의 자연이 너무나 좋았고, 좋은 선배들과 후배들이 많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은 그에게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크루(Crew)가 되었어요. 제가 하고 있는 ‘훈남스’, ‘밴드맛’, ‘밴드일곱시반’, ‘노는삼춘’, ‘블루달리아’ 등 춘천에서 활동하는 밴드와 음악을 사랑하는 동생들이랑 자연스럽게 크루가 형성 됐는데 음악가로 활동하는 것이 힘들 때가 참 많아요. 공연 당일 갑자기 취소 통보를 받는 일도 다반사고, 제대로 된 출연료를 받는 것도 어려웠을 때가 있었어요. 우리가 힘을 모아 서로를 지켜주자 하고 뜻을 모아 ‘뮤스펙트’를 만들었고, 그 중 제일 큰 형인 제가 대표를 맡은 거죠. 우리가 하고 싶은 음악은 춘천다운 음악이에요. 들으면 ‘아! 춘천 이야기구나’하고 저절로 생각하게 되는 음악이요. 올해는 각 팀마다 음원을 하나 이상 발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뮤스펙트가 커다란 우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를 피하는데 꼭 튼튼한 지붕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음악이라는 우산기둥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우산살이 되어 서로 어깨를 맞대고 비를 피하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뮤스펙트는 음악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자는 뜻으로 만든 이름이다. 누군가에게 대접받고 싶다면 일단 상대를 먼저 존중하자는 뜻에서 지었다. 목표 지향적이 아닌 사람이 중심이 되는 음악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뮤스펙트. 그들은 매월, 뮤지션스데이를 열어 음악인들이 하고 싶은 무대를 꾸민다. 그리고 뮤즈피크닉을 통해 시민들과 함께 어울린다. 무대와 관객의 경계를 허물고 음악으로 어우러져 함께 성장하는 뮤스펙트. 언젠가 시간이 흐른 뒤 서로 존중하는 뮤스펙트(music+respect)에서 완벽한 음악을 하는 뮤스펙트(music+perfect)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김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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