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끝 촉촉한 빗소리로 밤을 채우며 읽었던 시집은 세상 시집의 그 흔한 ‘발문’과 ‘시 해설’이 생략되어 있어 그의 시 세계를 내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어 좋았다. ‘분명 시인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의 시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인터뷰 당일, 몇 사람의 시인이 있는 자리에 부름을 받으면서 반가웠던 것은 내가 모르는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누에 같은 분이지요.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친근한 이미지지만 그 속에서 비단 실을 뽑아내는 그런 분입니다.” 문득 그의 시어들이 실이 되고 비단옷이 되는 상상을 했다.

‘샘밭’에 있는 조용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는 강·나무·꽃·산책길 등 시인의 둥지이자 삶의 터전인 ‘샘밭’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조금씩 번잡해지는 ‘샘밭’의 모습에서 자꾸 더 깊은 자연으로 향하는 그의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인제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춘천 율문리로 와 쭉 이곳에서 살았어요. 유년의 기억을 포함한 모든 기억이 이곳에서 비롯됩니다. 수년 전에 오항리에 들어가 1천500평의 땅을 얻어 농사지으며 살았어요. 연탄보일러 2개가 놓여 있었는데 깨고 나니 밑에 온돌이 있었어요. 전기도 끊고, 일종의 실험을 했던 것이지요. 최소한의 것들로 얼마만큼 견딜 수 있나 하는…. 산이 주는 선물을 기꺼이 받기도 했어요. 6~7년 정도 머물다 나온 지도 벌써 6~7년 되어갑니다. 언젠가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시인으로 살아온 넉넉하지 않은 살림, 최소한의 비용으로 골 깊은 자연에서 살 수 있을까? 그는 오항리에서 산 기간 동안 긍정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산이 가르쳐 준 ‘깊은 산은 게으르지 않으면 한 사람은 먹여 살린다’는 진리에 기댄다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다시 오항리가 아니더라도 더 깊은 자연으로 돌아가 살고자 하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자연에서 최소한의 것으로 사는 꿈을 꾸고, 끊임없이 시를 쓰는 그에게 시는 무엇일까?

“시요? 참 어려운 이야기네요. 가끔 글 쓰는 후배들과 ‘시인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는 모습이 시여야 하고, 시로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어느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이르러 보는 것, 그것이 저에게는 시라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님은 경찰공무원이었고 형제들이 터울이 많아요. 글을 쓰고 싶다니까 열 살 터울의 둘째 형이 '배고픈 직업이다'라고 말했던 생각이 납니다. 습작형태로 글을 쓰다 20대에 어떤 계기로 몇 상자 되는 습작들을 밭에서 태우고 접었어요. 갓 마흔이 되었을 때 다시 글을 써야겠다는 저항할 수 없는 힘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 시작하면 죽는 날까지 해봐야겠는 생각을 했어요. 그 생각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낸 시집은 2012년 첫 시집인 《둥근 집》, 짧은 시 85편을 통한 역설을 보여준 두 번째 시집 《긴 시》, 올해 5월에 출간한 100편의 시가 담긴 《참 먼 말》 등 세 권이다. 《긴 시》와 《참 먼 말》을 읽다 보면 ‘발문’이나 ‘시 해설’이 생략되어 있다. 처음 그의 시를 읽으면서 궁금했기에 시인의 의중을 물어보았다.

“네. 의도적으로 뺀 것이 맞습니다. 독자들은 시 해설에 관심이 없을 뿐더러 안내 역할이라기보다는 어떤 쪽으로 유도해서 ‘이렇게 읽어라’하고 시의 이해를 강요하게 되지요. 자유로운 시의 이해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좋아하는 장르라면 그런 해설과 관계없이 좋아하게 되거든요. 요즘 시가 산문화 일로를 걷게 되면서 더러 난삽해지고, 시인이 써 놓은 언어를 시인조차 설명하기 힘든 경우도 생깁니다. 이렇게 문장을 낯설게 만들어 놓으면 시가 독자들과 멀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누구나 읽고 이해되는 쉬운 시어들을 사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쑥부쟁이
벌개미취
구절초
그만그만

길이 보이지 않을 땐
활짝 웃어 보아
꽃은 하늘로도 길을 내더군
- 〈들길을 걷다 당신은〉, 《참먼말》


물이
땅에 쓰는 긴 문장 한 줄
심심한 필담
그래서
흐르는 것만 강이라고 한
너도 강이다
- 〈강〉, 《긴 시》


그의 시 곳곳에 농촌마을인 ‘샘밭’의 풍경이 담겨있다. 특히 ‘산책시편’이라고 소개된 《참 먼 말》에는 ‘먼지잼’, ‘부셍이’, ‘올방’ 등 시어들로 사용된 강원도 사투리들이 설명과 함께 담겨 있다. 그의 기억 속의 ‘샘밭’은 어떤 곳인가?

“옛날에 강들은 스스로 만든 길을 따라 움직였지요. ‘샘밭’의 강들도 더 안쪽에 있었어요. 인천에서부터 온 소금 배가 이곳까지 닿았다고 합니다. 순백의 강모래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꽤 깊이까지도 자리하고 있었어요. 앞강에 저녁이면 퉁가리 등 물고기들이 석양빛에 튀어 오르기도 하고, 달팽이도 잡았었지요. 미루나무 숲도 아름다웠고요. 점차 변해가는 데도 기억속의 풍경은 여전히 그 자리입니다. 사투리는 의도적이라기보다는 몸에 배어있는 것입니다. 인제에서 살다 와서인지 영동 쪽의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쓰고 살았어요. 시에서도 사투리를 부분부분 사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신조어들이 끊임없이 생겨나지만, 아름다운 어감이 있는 말들을 자꾸 버리는 것이 아주 아쉬웠습니다.”

《참 먼 말》을 읽다 보면 아내에 대한 시 몇 편들이 눈에 띈다. 〈아내〉라는 시에선 “안갠지 꽃인지 웃는/ 똑 당신입니다”라는 말로 아내를 노래했고, 〈미리 봄날〉에서는 아내의 봄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부창부수〉, 〈결혼기념일〉 등 몇 편의 시에서는 오래 같이 살아서 편안하면서도 애틋한 부부의 정이 느껴진다. 〈문〉이라는 시에 묘사된 세상의 모든 문을 통과하고 마지막으로 들어선 집의 “새파란 별빛이 안에서 쏟아지는 고요한 문”은 다만 문이 아닌 시인이 느끼는 집, 곧 아내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누구든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나이 들어 보니 미안했지요. 여유롭게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지 못했습니다. 이재에 밝지 못하다 보니 몇 가지 직업을 거치면서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이번 시집에서는 조금이나마 아내를 노래하고 싶었습니다. 더 깊은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아내 때문에 미루고 있습니다. 끝까지 함께 하면 걱정이 없는데 혹여 나중에라도 안사람이 혼자 남겨진다면 견디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지금이라도 떠나고 싶은 발걸음을 잡고 있습니다.”

인터뷰 전에 여러분들로부터 시인의 시의 세계를 보고 더 큰 곳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접고 있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했었다. 시인은 지난해까지 강원민예총 문학협회장을 역임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소통하는 세계와 그 세계를 확장시키는 것에 대한 시인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

“혼자서 시 작업을 하다 민예총에서 활동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문학협회장까지 맡게 되었지요. 일반적으로 진보라고 평하는 단체지만, 예술이라는 것은 진보·보수를 떠나 다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나아가고자 하는 벽을 깨지 않고서는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단이 때로는 권력화 되고 서열화 시키는 데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어요. ‘난 나대로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다행히 춘천 문단에서는 그런 경향이 덜하고, 민예총 문학협회장을 하는 동안 보람이라면 여러 단체가 마음을 열고 화합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단체에서의 활동이 내 길에 특별히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혼자서는 정체될 수밖에 없는 작업에 동료들로부터 자극을 받는 정도라고 생각해요. 시는 독자들을 통해서 평가받는 일입니다. 특별히 애써서 널리 알려 인정받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다. 독자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요.”

시인을 이야기하다 보면 목공예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아트마켓에서 시집 옆에 놓인 목공예 작품을 보면 그 모습들이 시인을 닮아있어 한 번 더 눈길이 가고, 종래에는 한 개 집을 수밖에 없게 된다.

“아, 목공예는 사실 아트마켓에 나가면서 시작했습니다. 시집만 가지고 나가 있으려니 너무 썰렁한 거예요. 손님들과 소통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소품, 액세사리 등을 만들 수 있는 목공예를 생각했습니다. 목공예를 시작하니 공구를 마련하게 되고, 미적 감각을 추구하게 되고 더 나아가 변형하게 되더라고요. 평도 좋아지니 더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나무는 시와 닮았습니다. 느낌이 너무 따뜻합니다. 몸에 지닐수록 색조가 깊어지고 광택도 점점 은은해집니다. 지니고 만져주다 보면 저절로 깊어지는 시와 닮았습니다. 차이라면 시는 생각을 자꾸 만들지만, 목공예는 자기를 덜어내는 작업입니다. 비워진 공간에 다른 생각을 만들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지요.”

세 권의 시집 속에서 각기 다르면서도 같은 곳을 향하고 있는 짧지만 여운이 오래 가는, ‘먼 말’이지만 향기 또한 멀리 가는 시인을 시를 만나 볼 수 있었다. 시인은 한 권의 시집을 출간 할 때마다 일시적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공황상태를 느낀다고 한다. 정확히 갈피가 잡히지는 않지만 아쉬운 것도 보이고, 또 다시 떠나야 할 길이 보인다는 것이다.

“제가 시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나를 끌고 가요. 의도적으로 내가 뭔가를 하다 보면 시와 충돌하게 됩니다. 앞으로도 시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생각입니다.”

시인을 이끌고 가는 시가 만든 네 번째 시집은 시인을 어느 곳에 다다르게 할 것인가? 짧지만 아쉬운 만남을 통해 본 시인의 진솔한 모습에서 다음 시집에 대한 기대가 커지지 않을 수 없다. 좀 이른 듯하지만….

원미경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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