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은 봉황과 관련된 지명이 여럿 있다. 그 중에 봉의산과, 그리고 봉추대가 직접적으로 봉황을 담아내고 있다.

봉황대

봉황은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동물로,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과 밀접한 관련을 지녔으며 기린과 함께 상상 속 신성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앞모습은 기러기, 뒷모습은 기린을 닮았는데, 머리 부분은 뱀의 목에 제비의 턱, 황새의 이마, 닭의 부리를 지녔으며, 몸은 원앙의 깃에 범의 등, 용의 무늬, 물고기의 꼬리를 하고 다섯 색깔을 갖추었다.

봉황이 태평성대를 상징하게 된 배경에는 순임금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순임금은 역사시대가 전개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상고시대의 최고의 인물로 정치를 아주 잘했다. 백성들은 임금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고 그저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며 자신의 일들을 열심히 하며 살아갔다. 이에 순임금은 음악을 만들어 궁중에서 연주를 했다. 이에 하늘에서 새가 날아와 뜰에서 춤을 추었는데, 그 새가 바로 봉황이다.

이 순임금의 음악을 ‘소(韶)’라고 하며, 이 음악에 맞추어 봉황이 춤을 추었다. 지금 춘천의 봉의산(鳳儀山) 명칭 또한 봉황이 날아와 춤을 춘다는 뜻을 취하여 지었고, 도청 자리에 있었던 문소각(聞韶閣) 또한 순임금의 음악인 소(韶)를 듣는다는 뜻이다. 문소각을 지키던 위봉문(威鳳門)과 조양루(朝陽樓)도 봉황과 연계된 이름이라는 점에서 춘천은 봉황의 도시라고 할만하다.

두산연수원 곁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인데, 춘천의 남산인 향노봉으로부터 누에머리처럼 흘러내려와 소양강 백로주를 마주하고는 멈추었다. 송광연(宋光淵,1638~1695)이 1684년에 춘천부사로 와서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鳳凰臺上獨登遊
봉황대(鳳凰臺)에
홀로 올라 거니니
臺下長江衮衮流
봉황대 아래 긴 강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蘭縣舊基猶有石
난현(蘭縣) 옛 터엔
아직도 돌이 남았건만
貊都遺迹捴成丘
맥국(貊國) 도성 유적은
모두 언덕이 되었어라.
晴波近蘸三山影
맑은 물결엔 삼학산 그림자
가까이 잠겨 있고
落景遙連二水洲
낙조는 두 강 모래톱에
멀리까지 이어졌구나.
戀闕丹心同李白
임금 향한 충심은
이백(李白)과 같건만
暮天西望更添愁
저물녘 대궐 바라보니
시름만 더해지네.
- 登鳳凰臺 次李謫僊韻
(봉황대에 올라 이백의 운자를 이용하여 시를 짓다)

춘천으로 좌천되어 내려왔기 때문일까? 지난날의 회고와 시름, 그리고 원망이 시에 짙게 배어 있다. 난현은 신라 때 지명으로 춘천의 고탄과 고성리 지역을 말한다. 양통마을 입구에 선돌이 지금도 서있다. 맥국은 신북읍을 중심으로 춘천지역에 초기 부족국가 형태의 모습으로 존재했던 나라였지만, 이미 언덕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강물에 잠겨 있는 삼학산(三鶴山:三岳山)과 소양강 및 자양강 사이의 백로주 모래톱에 석양이 물들어 여전하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시절은 유한하나 그에서 바라보는 자연풍광은 무한하다. 그 유한과 무한 사이에 인간이 놓여 있다. 그래서 무한한 자연과 유한한 인생 사이에서 고민한다.

송광연 또한에서 춘천을 다스리는 치자로써 태평성대를 갈구하고자 했으나, 여전히 권력에서 멀어져 감을 내심 이겨내지 못하고 시름과 푸념에 머무르고 마는 한계를 노정했다.

춘천에서 이곳에 정자를 세운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보았다. 이는 지난해 4월에 있었던 토론회 결과가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어 자못 기대가 된다. 봉황이 봉의산에서 태평성대에 맞추어 춤을 추고에 날아와 쉬듯이, 우리네 인생의 걱정과 시름을 날려버릴 수 있는 명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허준구 (춘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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