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천 조각공원 내에 있는 청오 차상찬 동상

차상찬은 춘천 사람이다. 그는 소양강 기슭 송암리에서 성장했다. 18세에 서울로 유학을 떠나 신진 교육을 받고, 당시 대표적인 언론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면서도 그는 늘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는 종종 “나는 강원도 사람이다”, “우리는 춘천 사람이다”라고 밝히면서 애향심을 드러내고,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담은 글도 여러 편 썼다.

<춘천! 춘천!! 춘천!!! 춘천의 봄>(《별건곤》 통권 6호)에서 그는 “춘천의 봄이 항상 그립다”면서 소양정과 조양루, 신연강, 진병산, 삼학산, 청평산, 경춘가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세세히 묘사하고, “우두의 배꽃은 조선에서 제일”이라며 자랑하기도 했다. 개벽사에서 기획한 ‘조선 문화의 기본조사’(1923.1-1925.12)에서 그는 강원도 일대를 답사하고 《개벽》(42호)에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다른 지역보다 춘천을 가장 자세히 기록했다. 지리적 위치, 행정구역, 산업과 교육, 종교와 교통, 의료기관과 명승고적, 민요와 동요, 그리고 ‘우두산’을 일본의 유적인 ‘소시모리’라고 왜곡한 시류까지 춘천의 과거와 현재를 상세히 기술했다.

또한 그는 ‘관동학회’ 설립을 추진해 남궁억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학술강연회와 토론회, 강습소 등 강원도 중심의 다양한 애국계몽운동을 펼쳐나가는 데에 앞장서고, 문학청년 김유정이 소설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면을 확보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김경숙을 추천해 최초의 잡지사 여기자로 근무하도록 기회를 마련해주는 등 동향의 인재들을 위해 기꺼이 힘을 보탰다.

어린 시절에 공부한 한학, 의병과 천도교와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들은 평생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자란 송암리는 화서학파의 김평묵이 학문을 닦으며 제자를 길러내던 곳이었고, 그의 부친 차두영과 백부 차철영, 그리고 셋째 형 상학은 모두 과거에 급제한 한학자들이었다. 그의 매형 정인회는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분격해 친일세력 타도를 외치며 일어났던 ‘을미의병’에서 춘천지역을 선도했던 핵심적인 인물이었고, 그의 넷째 형 상준의 처남인 민영순은 일찍이 천도교에 입교하고 ‘갑진개화운동’ 당시 강원도 지역을 이끈 주역으로 3·1운동에 참여하고 개벽사의 영업과 발행을 도맡았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사회 현실에 눈을 떠 진보적인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키워나갔다.

차상찬은 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는 《개벽》 72호에 ‘소양학인(昭陽學人)’이라는 필명으로 <수춘만평(壽春漫評)>을 쓰는데, 이 글에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조선 각도 중 교통이 제일 불편한 곳은 아마 우리 춘천일 것”이라며, 폭우로 파괴된 도로의 복구공사가 늦어지는 상황을 지적하고, “도로야 잘 되든 안 되든 공사 맡은 일본인의 배만 불렀으면 제일 상책인가”라고 비판했다. 또 일본인 선생이 사직한다고 단식동맹한 사건을 거론하면서, “사직을 하였기에 그렇지 만일 죽었더라면 전부 순사(殉死)할 터인가”라며 개탄했다.

차상찬은 천신만고 끝에 자신의 손으로 속간한 《개벽》 신간 제1호에 <병신병란 관동민병란비화(丙申兵亂 關東民兵亂秘話)>발표해 아홉 살 때 체험한 춘천의병의 전말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 글은 단순한 추억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형상화한 역사서사이며, 춘천의 정신사에 대한 증언이었다.

그가 《개벽》 마지막 호와 신간 호에 굳이 춘천과 관련한 글을 실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도 총독부의 검열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누구보다 잘하는 그가 식민지 현실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항일의 현장을 생생히 기록한 글을 쓴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차상찬에게 춘천은 단순히 지리적인 고향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서 춘천은 올곧은 정신의 원천이자 깨어있는 의식의 뿌리였다.

그가 춘천을 기억하며 엄혹한 시절을 견뎌냈듯이, 이제 춘천이 차상찬을 기억해내고 그를 호명해야 할 시간이다. 공지천 조각공원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정현숙 (강원문화교육연구소 소장)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