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가방을 멘 남자가 카페로 들어온다. 남자는 한눈에 주변을 둘러보다가 창가 구석자리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화가들의 인터뷰 영상을 촬영하러 왔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그는 수줍게 웃는다. 예정시간보다 한참 먼저 도착한 그는 카페 안 곳곳을 둘러보다 자신이 처음 잡은 자리에 카메라 다리를 편다.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자리에 카메라 앵글을 맞추는 감독의 시선이 새롭다.

유재균, ‘Montage: Video Piano’

인터뷰 하는 감독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긴장을 풀고 편한 마음으로 하면 된다고 재차 주문하는 그의 인상에 시선이 머문다. 두툼한 눈두덩 아래로 일부 가려진 검은 눈동자에서 밝은 빛 한줄기가 흘러나온다. 의지와 집념을 담고 있다. 사각 프레임으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초점을 맞추는 반복된 과정에 단련된 눈빛이다. 능숙하게 작업을 진행하고 호의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달리 세상사에 닦이지 않은 말투는 그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한다.

인터뷰가 끝나고 화가들과 이야기 나누는 자리에서 감독은 자신을 정식으로 소개한다. 독립영화 상영관 ‘일시정지 시네마’의 대표라 말하는 그의 표정에 자부심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지난해 5월 개관해 1년 남짓 운영하며 겪은 어려움들을 젊은 대표는 솔직히 털어놓는다. 한 달 극장 수입이 10만원 정도에 불과해 따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운영이 된다는 스물아홉 살 대표의 고충이 힘겨워 보인다. 지역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영화들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과 4년은 버티는 게 목표라는 의지가 뿜어내는 기운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전해진 선명한 인상과 무관하지 않다.

바삐 떠나는 대표의 등 뒤로 큰 가방이 한동안 여운으로 맴돌다가 미술시장축제에서 그가 만든 화가 동영상을 본다. 감독의 프레임에 잡힌 카페 공간과 색감 처리가 차분하다. 편집도 섬세해 보인다. 전시장 안쪽에는 그의 이름으로 된 작품 ‘몽타주: 비디오 피아노’가 설치돼 있다. 뜻밖이다. 1인 다역을 해내다니. 암막 커튼을 열면 정면 가운데에 스크린이 걸리고 그 앞에 키보드가 놓여있다. 하얀 건반을 누르면 스크린에 영상이 뜬다. 한 남자가 밤길을 걸어온다. 3초가 지나면 영상은 정지된다. 다른 건반을 누르면 두 남자가 시장 뒷골목에서 결투를 벌인다. 검은 건반을 누르면 넓은 풀밭에 젊은 남녀 셋이 나란히 앉아있다. 청년의 재기발랄한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감독은 관객의 주체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건반을 눌러야 영상이 뜨고, 누르는 건반에 따라 영상은 몽타주로 편집된다.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인터랙티브 아트’로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본다’는 행위를 소비로만 보지 않고 일정한 조건 안에서 관객이 참여해 새로운 이야기, 다른 이야기로 엮어내는 장을 펼치라 주문한다. 독립영화 상영관도 다르지 않다. 일반 상영관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영화들을 만나면서 인생의 다른 면을 보기 바라고, 다른 삶을 꿈꾸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대학 1학년 수업시간에 본 만화영화가 그의 인생에 일으킨 파장을 따라, 초등학교 4학년 때 우연히 만난 컴퓨터 세계의 신기함을 좇아 고군분투한 시간의 결과로 그는 지금 ‘일시정지 시네마’라는 큰 가방을 지고 간다. 그의 웃음 뒤에 숨은 공허가 사라지길 기원한다.

 

박미숙 (카페 ‘느린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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