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문화원 홈페이지에 따르면, 문소각은 엄황이 춘천부사로 부임한 이후인 1648년(인조 26)에 건축됐다. 김득신(金得臣)의 <수춘문소각서(壽春聞韶閣序)>에 의하면 문소각을 봉의산과 연계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봉의산의 ‘봉의(鳳儀)’는 ‘봉황이 와서 춤을 추다’라는 뜻인데, 이에 대응하는 의미로 ‘문소(聞韶)’라는 의미의 건물을 지었다. 문소란 순(舜) 임금의 음악인 ‘소소(簫韶)를 듣는다’는 뜻이다. 이 문소각은 1750년대에 1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가 1869년 춘천부사 김병육(金炳陸; 1869~1871년 재임)에 의해 24칸으로 확장됐다. 이후 1890년(고종 27)에 왕명에 의해 민두호가 기존 건물을 활용해 이궁을 완성했다. 이 문소각은 1940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했는데, 한국전쟁 때 다시 소실됐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문소각

문소각이 1890년에 이궁(離宮)의 중심 건물로 활용되면서 춘천이 도호부(都護府)에서 유수부(留守府)로 격상됐고, 이후 1896년에 강원도관찰부로 승격돼 도청이 자리하게 됐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문소각을 중심으로 임금이 유사시에 피난할 수 있는 이궁이 조성됨으로써 춘천이 도청소재지가 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도청이 자리하기 150여년 전인 18세기 중반에 문소각의 앞에까지 호랑이가 살았음을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시편이 있어 이를 소개한다.

蹴雪群圍進​(축설군위진)
눈을 차며 무리가 포위해 나가고
​穿林毒砲隨(천림독포수)
숲을 뚫고 독을 묻힌 포수가 따른다.
​負嵎徒自恃(부우도자시)
산모퉁이 등지고 스스로를 의지할 뿐
​離窟竟何爲(​리굴경하위)
굴을 떠나니 마침내 어찌 하랴?
​無賴咆哮壯(무뢰포효장)
포효하던 장려함은 의지할 곳 없더니
​猶能顧眄遅(유능고면지)
좌우로 돌아보며 느릿느릿 움직일 뿐이네.
​蒼崖終灑血(​창애종쇄혈)
푸른 벼랑에서 끝내 피 뿌리니
​人擬寢其皮(인의침기피)
사람이 그 가죽에서 잠을 자리라.


시는 조재호(趙載浩; 1702~1762)의 <문소각에서 호랑이 사냥을 관람하다(聞韶閣觀虎獵)>로 《손재집(損齋集)》에 실려 있다. 문소각은 전패(殿牌)를 모시고 부사가 행정업무를 마친 후 손님을 맞이하거나 휴식을 취하던 복합공간으로서, 현 도청의 의회건물 일부와 청사 서쪽 일부에 걸쳐 있었던 건물로 봉의산 중턱에 있었다. 봉의산이 대룡산으로부터 산맥이 이어져 내려왔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춘천 인근 큰 산에는 호랑이가 적잖게 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호랑이 잡는 광경이 시에 잘 묘사돼 있다. 먼저 몰이꾼이 무리를 지어 눈을 차며 포위해 나가고, 그 사이에 독을 묻힌 돌쇠뇌를 들고 포수가 숲을 가로질러 호랑이를 따라가는 장면을 묘사했다. 이어 호랑이가 산모퉁이의 구석으로 몰리자 사납게 울부짖던 모습은 간데없고 좌우를 돌아보며 달아날 틈을 엿보며 느리게 움직이는 초라한 모습을 묘사했다. 결국 호랑이는 낭떠러지에서 피를 흘리며 최후를 맞고 그 가죽은 사람의 잠자리에 쓰이게 된다고 했다.

무리를 벗어나 호랑이굴에서 떨어져 나온 호랑이 사냥 모습이 시 속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 사람도 사람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면 이러한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는 것은 아닐까!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함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허준구 (춘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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