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면 강선봉의 강선사로 오르는 길목인 칼봉 자락에 ‘밤나무 추억길’이라 명명된 100미터 길이의 산책로가 조성되었다. 이곳에 오르면 북한강과 강촌 일대가 시원스레 내려다보인다. 강선봉 아래에는 옛 강촌역사가 있고, 그 앞쪽으로는 북한강을 가로지르는 강촌의 명물 출렁다리가 있었다. 그리고 ‘강촌에 살고 싶네’라는 노래가 생겨났고, 지금은 그 노랫말비가 ‘강촌출렁다리’ 가까이에 조성되어 있다. 강촌은 1970~1980년대 젊은이들의 해방구로 인식될 만큼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던 명소 가운데 하나였다.

강촌으로 몰려들던 그 젊은이들은 이제 50대 중반을 지나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면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 강촌 일대는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이곳 강촌에서 1852년 출생한 습재 이소응의 문집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돼 있다.

“춘천 관할 남쪽 삼십 리에 구곡(九曲)의 물이 서쪽으로 나가 동으로 흘러 들어가고 삼악산이 북으로부터 남으로 이어지니, 즉 우리 가족이 세거(世居)해온 땅이다. 삼악산 남쪽으로 둔덕(屯德) 나루가 있고 나루에서 10리나 맑은 여울을 이룬다. 구곡의 남쪽으로 구만이들(驅蠻野)이 있고 구만이들은 5리나 되는 전평(田坪)을 간직하고 있다. 그 남쪽이 소주현(紹朱峴)인데 고개의 북쪽을 통칭(統稱) 바일(排逸村)이라고 한다. 이 땅에 은거하며 산수(山水)를 바라보고 그 이름과 뜻을 구명(究明)한다면 또한 볼 만해 감흥(感興)을 일으키는 데에 일조(一助)한다.” 《국역습재선생문집》

습재 이소응은 1852년 남산면 강촌리에서 태어나 1895년 을미의병 대장에 오르기 이전까지 이곳에서 성장했다. 습재는 자신의 고향 마을의 지명에 관심을 나타내며 그 지명 하나하나에 의미를 불어넣었다. 그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옛 강촌 출렁다리가 놓여 있었던 곳의 둔덕나루를 덕(德)을 모아들이는 나루로, 구만이뜰은 오랑캐를 몰아낸 뜰로, 소주고개는 주자(朱子)를 밝히는 고개로, 바일촌을 게으름을 몰아낸 마을로 그 의미를 되새겨놓았다. 그러면서 산수를 바라보고 그 지명의 의미를 연구해 밝혀낸다면 볼 만하고 감흥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준다고 했다.

이렇게 강촌 일대를 멀리까지, 그리고 입체감 있게 조망할 수 있는 장소가 어디일까? 그곳이 바로 강선봉이다. 그러면 강선봉이란 단어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아마도 1972년 국립지리원에서 지도를 제작하면서 ‘신선이 내려올 듯 경치가 빼어난 봉우리’란 이름을 붙여 강선봉(降仙峰)이라 붙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강선봉 밑의 지명을 ‘좌수머’리라고 하는데, 이는 ‘좌수가 시작되는 곳’이란 뜻으로 파악되는데, 습재는 이 봉우리를 ‘좌수봉’이라 부르고 있다. 좌수라는 말에는 강촌 일대에서 가장 높으면서 강촌이 시작되는 마을 어귀라는 뜻이 있다.

습재는 이 좌수봉과 관련해 시를 몇 편 남겼는데, 그 중 습재의 시를 대표할 수 있는 〈좌수봉에 올라 봄을 감상하다(登座首峯賞春)〉를 소개한다.

花發木榮方好辰(화발목영방호진)
冠童六七起吾人(관동육칠기오인)
遠登峯壑高明處(원등봉학고명처)
聊在乾坤造化新(료재건곤조화신)
日煖風和宜月令(일난풍화의월령)
野農山釆亦天眞(야농산변역천진)
閒來無事不稱意(한래무사불칭의)
蕩滌胸中多少塵(탕척흉중다소진)

꽃과 나무 피어나는 아주 좋은 시절에,
관동(冠童) 예닐곱이 나를 일으키네.
멀리 봉우리에 오르자 사방이 바라보이니,
하늘과 땅에 조화가 새롭구나.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은 온화하여 농사짓기 딱 좋아,
들판에 농사짓고 산에는 나물 뜯어 또한 천진(天眞)이라.
한가로우나 뜻에 걸맞지 않은 일이 없어,
가슴 속 묵은 먼지 말끔히 씻어내는구나.

 

 

허준구 (춘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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