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대한민국은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을 겪었다. 국정을 농단한 대통령은 다사다난했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청와대를 나왔다. 많은 국민이 ‘이게 나라냐’며 분노했고 얼마 후 치러진 대선에서는 ‘나라를 나라답게’라는 슬로건을 내건 후보가 당선되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좋은 국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국가’와 ‘좋다’라는 단어는 추상적이므로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사회철학자 노직(Robert Nozick)은 개입을 자제하는 ‘최소 국가’를 이상적인 국가로 보았다. 반면 현대의 많은 국가들은 조세 등을 통한 복지를 실현하고 있다. 복지 외에도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좋은 국가에 대한 의견은 매우 다양해질 것이다.

나는 생각의 폭을 넓히고자 국가에 대한 다양한 책들을 읽으려 노력했다. 이 책도 그 노력의 일환으로 읽게 되었다. ‘리더답게’, ‘시민답게’, ‘국가답게’로 구분되어 있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느낀 것은 리더, 시민, 그리고 국가가 절대로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 말이 당연해 보이는데도 새삼스레 느껴진 것은 아마 국민과의 배타성을 추구했던 전 대통령 때문이 아닐까 싶다.

리더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리더답게’를 읽으면서 ‘레굴루스처럼 적과의 신의도 지키는 사람이 있는데, 누구는 국민과의 신의마저 져버리는 구나’하고 탄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좋은 리더가 아니었음을 탄식하기보다는 앞으로 나올 좋은 리더를 뽑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 현명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림자는 빛이 있어 생기는 것이니까, 지금의 그림자가 다 걷힐 때까지 걸어가면 빛을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위로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좋은 리더는 어떻게 뽑을까? 답은 간단하다. 어떤 리더가 좋은 리더인지 알고, 그런 사람에게 투표하면 된다. 이를 위해 내가 책을 보면서 생각해 본 좋은 리더의 조건은 세 가지다.

첫째는 ‘말’이다. 말을 잘해야 좋은 리더인지 아니면 좋은 리더가 말을 잘하는지는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말을 잘하는 사람이 더 많은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말을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진심이 느껴지도록 말을 하고, 말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잘 구분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체이탈 화법을 즐겨 쓰고 대본이 없으면 말을 잘 못했던 리더, 말을 해야 할 때인데 침묵하거나 엉뚱한 말을 했던 리더를 떠올려보면 말이 왜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둘째는 리더에게 요구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아는 것이다. 리더는 사회와 시민들에 의해 권력을 얻는다. 권력을 얻은 그들은 책임을 질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도덕적 책임을 져야한다. 이는 독일의 생태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가 ‘인간만이 자연을 책임질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이 자연을 책임져야 한다’는 당위를 도출해 역설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 좋은 리더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책임을 회피하는 리더의 예시를 생각해 보았다.

어느 비정규직 파견 노동자들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은 한 기업의 하청업체에서 일하다가 공기 중의 메탄올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하청업체와 기업은 책임을 떠넘기기에 바빴다. 재판 중에는 지원해 주는 ‘척’이라도 했는데, 가벼운 형벌만 받고 끝난 후에는 연락조차도 없다. 이것만 보면 ‘뭐 저런 기업이 다 있나’ 싶겠지만 그 기업은 바로 대한민국의 리더를 자처하는 삼성이다. 심지어 삼성은 전자산업시민연대 가맹기업이므로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책임질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보상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하고 있다. 과연 이런 기업이 좋은 기업일까? 이들에게 ‘리더’ 기업을 자처할 자격이 있을까? 리더다운 리더는 베풀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이 얻은 사회적 희소가치가 결국에는 사회로부터 나왔음을 인지하고 그들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의무를 다할 각오가 된 자들만이 진정한 리더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유도하는 것이다. 나는 전에 메탄올 피해자 토크 콘서트 관련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영상 중에 눈물을 훔치던 한 국회의원이 이런 말을 했다.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정부가 제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처음 보는 국회의원의 말을 통해 ‘리더의 품격’을 느낄 수 있었다.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리더로서 시민의 품격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보였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신민과 비교해 보면, 시민은 나라의 주권자, 즉 정치·사회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존재다. 이러한 민주시민의 의무에 대해서는 책이 내게 한 질문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감시받는 죄수가 될 텐가, 잠재적 범죄자인 권력을 감시할 텐가?”

리더가 시민이 제 역할을 다 하도록 행동을 취했다면 남은 것은 시민의 반응이다. 그래야 좋은 리더가 완성되고, 이는 곧 좋은 시민의 완성을, 더 나아가서 좋은 국가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두 번째 장인 ‘시민답게’의 내용처럼, 사랑과 이별, 자살의 고민, 그러다 맞는 노년기까지 정치 참여 주체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각자 삶의 주체로서의 역할도 수행해야 하는 시민들은 정치에 무관심해질 수도 있고 이타심이 줄어들 수도 있다. 이때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 마지막 장 ‘국가답게’에 나오는 갖은 사회적 병폐를 비롯해 정치적 무관심과 이기심 또한 국가와 시민에게 큰 해악이라는 것을 아는 리더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품격 있는 시민이 품격 있는 리더를 만든다. 이를 아는 리더는 시민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선순환이 일어나는 국가가 바로 품격 있는 국가다. 우리 대한민국은 어떨까. 대한민국의 지도자는 품격 있는 리더인가? 그들을 뽑은 국민은 품격 있는 시민인가? 이들이 만들어가는 대한민국은 품격 있는 국가인가? 당당하게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품격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박운상 (성수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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