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이 한 장 남았다. 날짜 밑의 여백에 써놓은 빽빽한 메모가 퀭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어떤 날은 하루치의 공간이 부족해 네모 칸 밖으로 화살표를 그리고 그 끝에 몇 자 더 써넣기도 했다. 화살표는 세상으로 나가는 사다리가 되기도 했지만, 제 가슴을 겨누는 창끝이 되기도 했다.

지나간 날들의 행적을 들추니 건초더미 같은 볼펜자국들이 감흥도 없이 푸석거린다. 그날도 분명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것으로 기뻐하고 또 무언가를 얻기 위해 고심하고 동동거리며 핏대를 올렸을 텐데, 한 방울의 눈물자국도 한줌의 웃음소리도 출렁거리지 않는다.

언 배추 몇 포기 쓰러져 있는 채마밭에 눈발이 날린다.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 그걸 할 수밖에 없었고, 종종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기도 했다. 더러는 그것으로 인해 중요한 무엇을 잃기도 했고, 때론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어 억장이 무너지기도 했다.

욕망은 늘 힘이 세다. 그러나 돌아갈 자리가 없다.

내일 알 수 있는 것들을 오늘 알 수만 있다면….

송병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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