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시시했다. 잉여였고, 여백으로 가득 찬 주변인이었다. 시간은 계속 전진할 거라는 맹목적인 믿음 정도가 돈 없고, ‘빽’ 없는 내게 유일한 스폰서였던 시절이 있었다.

뭘 하지 않는 시간은 잘도 지나갔다. 소리 없이 구레나룻 위쪽에 서릿발이 들어섰을 때, 너무도 하찮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보이면 그것들과 씨름하느라 삶의 속도는 더뎌지고 뾰족했던 생각은 무뎌지기만 한다. 자기 존재의 의심. 그 고통스런 셈법의 지난날. 재인이는 대기업 부장이 되고, 준표는 카지노에서 잭팟을 터트려 외제차를 타고 다니고, 의사였던 철수는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털어먹었다는 고소한 얘기까지. 그런데 왜 나는 이 영화에서 한결같이 지나가는 행인 13인지. 언제나 같은 엔딩의 익숙한 동창회 풍경 같은 남루한 군상들의 청춘 이야기. 오늘 소개할 책은 《서른의 반격》(손원평 지음·은행나무 펴냄)이다.

“나는 그의 미련함이 반갑지 않았다. 모름지기 사람은 적당히 일을 해야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분수에 맞게, 주어진 시간과 급여에 맞게. 그러므로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는 비정규직인 우리에게 일이라는 건 꼼수, 눈치, 요령의 3요소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최소한의 노동이라야만 한다. 그래야 헤프게 이용당하지 않고, 당연한 듯 착취당하지 않고, 적당히 치고 빠질 수 있다.”

올림픽이 있던 1988년에 태어난 주인공 김지혜 씨는 흔하디흔한 그놈의 이름 때문에 출석부에 ‘김지혜 B’로 불린다. 학창시절 ‘김지혜 A’의 빵셔틀 담당이었던 그녀의 이름은 ‘삐’였다. 나 하나쯤 없어진다고 해도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시스템에 감사하며, 그저 하루하루를 ‘최소한의 노동자’로 살아가는 이 시대의 청춘들의 슬픈 자화상. ‘삐’에서 김지혜로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발칙한 전복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얼개다.

“실제로 하는 일은 미미하고 우스워 보일지 몰라요. 다만 그 우스움이 공기에 어떤 진폭을 줄 수는 있겠죠. 그러니까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는 맙시다. 행위 자체가 목적입니다. 우리는 그냥 놀아보면 되는 거예요.”

권위와 위선에 가득 찬 세상에 균열을 내는 ‘삐’들의 반격은 고작 김 부장의 자리에 몰래 콜라주 조각 글자로 협박하거나(방귀 좀 뀌지 마! 이 가엾은 돼지님아!), 지역 국회의원 시장방문 행사에 계란을 던지는 퍼포먼스 따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소소하고 발칙한 놀이의 끝에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되찾을 용기를 ‘획득’한다. 결국 이들의 이름을 빼앗았던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의 안전함과 평온함이었던 것이다.
내게도 “나 같은 것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어. 그땐 세상이 바뀌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라는 소설 속 김 부장의 독백이 삶의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작가 손원평은 김 부장을 ‘늙어버린 시민’이라 애잔하게 표현했는데, 살포시 폐부를 찔렀고 아팠다. 꼰대가 싫어서 아니, 꼰대들에게 당하는 게 싫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사과한다. 빚진 과거를 갚는 게 우선이었다.

인생을 계산하는 밤은 고역이에요.
인생의 심줄은 몇몇의 추운 새벽으로 단단해 집니다.

넘어야겠다는 마음은 있습니까
저절로 익어 떨어뜨려야겠다는 질문이 하나쯤은 있습니까

…누구나 미래를 빌릴 수는 없지만
과거를 갚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 〈청춘의 기습〉, 《바다는 잘 있습니다》(이병률 지음·문학과지성사 펴냄)

류재량 (광장서적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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