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노래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꽤 오랫동안 1위를 차지하며 불렸던 노래 중의 하나가 ‘소양강처녀’일 것이다. 마치 국민가요처럼 누구나 이 노래를 열창했고, 노래방 시간이 종료될 쯤이면 이 노래를 합창하곤 했다. 그 가사말도 어렵지 않고 친숙하게 다가왔으니, 아마도 이별로 인한 한(恨)의 정서(情緖)가 촉촉하게 배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일제강점기와 남북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으며 우리네 인생사에는 생이별이 비일비재하면서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의식 내부에는 한의 정서가 차지하고, 기나긴 남북 긴장과 유신독재, 군부의 민주항쟁 탄압으로 이어지며 더더욱 팍팍했던 서민을 한의 정서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정서를 깔고 대중의 가슴에 스며든 노래가 바로 ‘소양강처녀’가 아니었을까?

이 노래 가사는 2절까지만 보통 알려져 있지만 ‘소양강처녀상’ 앞에 세워진 노래비를 보면 3절까지 작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
이렇게 기다리다 멍든 가슴에
떠나고 안 오시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달뜨는 소양강에 조각배 띄워
사랑의 소야곡을 불러주던 님이시여
풋 가슴 언저리에 아롱진 눈물
얼룩져 번져나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가슴 태우는 소양강 처녀


‘소양강처녀’ 가사말의 원류쯤 되는 한시가 있어 이를 소개한다.

願君莫唱西洲曲(원군막창서주곡)
願君且聽昭陽歌(원군차청소양가)
昭陽江水淸且暖(소양강수청차난)
門前毿毿楊柳多(문전삼삼양류다)
東家女兒顔如玉(동가녀아안여옥)
月明浣紗江上來(월명완사강상래)
夜深驚起鸛鶴羣(야심경기관학군)
鳴飛直過鳳凰臺(명비직과봉황대)
- 金道洙(199~1733) ‘昭陽歌’

낭군님 이별노래는 부르지 마시고
낭군님 소양가를 들어주세요.
소양강 강물은 맑고도 따뜻하고
문 앞에 수양버들 가늘게 늘어졌어라
동쪽 집 계집아이 옥 같은 얼굴로
달 밝자 빨래한다며 강가로 나왔구나.
밤 깊어 물새들이 놀라 깨어나서는
울며 곧바로 봉황대로 날아가네.


한시의 주인공과 ‘소양강처녀’ 노래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여성으로, 떠나간 임이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한시에 ‘소양가(昭陽歌)’가 보이는데, 이 노래의 내용이 3행부터 8행까지다. 봄이 오니 강물은 맑고도 따뜻하고, 문 앞에 수양버들은 가늘게 늘어졌다. 사랑하는 이를 멀리 떠나보낸 동쪽 집 여자아이는 옥같이 하얀 얼굴로 빨래를 핑계로 달 밝자 낭군 만나던 강가로 나왔다. 밤 깊도록 돌아가지 못하고 물가를 서성이다 그만 잠든 물새를 깨우고, 놀란 물새는 무리지어 봉황대로 날아가 버린다. ‘소양강처녀’ 가사에 등장하는 소재와떠나간 사람이 돌아와 주기를 기다린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소양강처녀’ 2절에 나오는 동백꽃은 남녘의 빨간 동백꽃이 아닌 생강나무로 알려진 노란 동백으로 봄에 피는 꽃이다. 이를 통해 노래의 배경과 한시의 배경은 모두 봄임을 알 수 있으며, 한시와 노래가사를 통해 소양강처녀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다. 나이는 열여덟이고 얼굴이 옥같이 뽀얀 피부를 가진 가녀린 소녀의 모습이다. 한시와 노래가사에 등장하는 새는 화자의 쓸쓸함을 나타내는 심리적 대리물로 울고 있는 공통점을 보인다. 한시에서 새가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봉황대로 날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낭군이 돌아올 것이란 믿음이 반영되어 있다. 저녁놀이 질 무렵 한시를 들고 소양강처녀 노래비와 처녀상을 찾아가 한 번쯤 읊조리며 감상해본다면 어떻겠는가!

허준구 (춘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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