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 판 〈오정희 컬렉션〉

1968년 등단한 소설가 오정희를 1970년대에 내가 알고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두꺼운 장막을 젖힌 유리창을 통해 찌르듯 부시게 눈 속으로 들어오는 빛처럼 오정희의 소설세계가 내 영혼 속으로 돌연 밀고 들어온 때는 1984년 정초일 터다. 내게 있는 오정희의 첫 소설집 《불의 江》의 오래된 판본은 1983년 11월 초판 4쇄본이고, 두 번째 소설집 《幼年의 뜰》은 1981년 7월 초판 1쇄본이다. 정초 집에서 책을 읽으며 지내자던 중 산책을 나섰다 책방에 들러 오정희의 이 두 작품집을 샀을 것이다. 그리고, 두 권을 이내 다 읽었다, 당인리 발전소 근처의 아파트, 전망을 가로막는 그 건물에 대한 ‘적의’, 밤의 창을 통해 방안을 가득 채우는 조금도 뜨겁지 않은 ‘붉은 화염’, “또한 불이 타고 있는 강 건너, 꽃보다 더 진한 어둠 속에서 메마른 목소리로 울고 있는 한 마리 삵을 보고 있는 듯한 쓸쓸함”(〈불의 江〉)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양갈보가 되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던 치옥이와 의붓자식이기를 바라던 ‘나’, 그리고 “초조(初潮)였다”는 마지막 문장(〈中國人 거리〉)도 여전히 생생하다.

등단 50년 기념 〈오정희 컬렉션〉 출간

오정희는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완구점 여인〉이 당선, 스물한 살로 문단에 데뷔해 올해로 50년을 맞는다. 그의 소설집 5권 모두를 출판한 ‘문학과지성사’는 이를 기념, 그간 출판한 소설집 《불의 강》, 《유년의 뜰》, 《바람의 넋》, 《불꽃놀이》, 《새》를 세트로 묶어 지난해 12월 〈오정희 컬렉션〉을 냈다. 1977년 소설가 김승옥의 표지 그림/장정으로 ‘세로짜기’의 《불의 江》이 처음 나온 지 41년 만에 〈컬렉션〉이라는 ‘출판 디자인’ 개념을 도입, 그의 소설들을 한 데 모은 것이다.

그리고 이는 춘천시민인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다. 올해는 소설가 오정희가 춘천생활을 시작한 지 40년이 되는 해다. 춘천의 삶은 오정희의 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주인공이 30대 이상인 소설들의 공간은 여러 작품에서 춘천의 흔적을 묻히고 있다. 〈꿈꾸는 새〉·〈비어있는 들〉·〈별사〉(《유년의 뜰》), 〈야회〉·〈밤비〉·〈하지〉·〈전갈〉·〈지금은 고요할 때〉(《바람의 넋》), 〈옛 우물〉·〈파로호〉·〈그림자 밟기〉·〈불꽃놀이〉(《불꽃놀이》), 그리고 《새》, 〈구부러진 길 저쪽〉. 춘천에 온 이후 발표한 25편의 작품 가운데 14편의 작품에서 춘천을 읽을 수 있다.

봄가을이 없는 고장, 낚시의 출발지, 서울에서 오는 기차의 종착역, 지금은 사라진 근화동 시외버스 터미널과 그 옆 약국, 그곳의 공중전화, 소양2교 근처 번개시장과 그 근처 커피숍, 역시 그곳의 공중전화, 중앙시장 안의 소머리국밥집, 가든파티를 열 수 있는 집과 아이를 업고 걸리며 지나던 돌담길, 아파트 지나 과수원,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을 ‘나’의 작은 아파트, 골짜기를 메운 새로운 택지 등 춘천의 흔적들은 알게 모르게 그의 소설의 서사에 간섭한다. 오정희 스스로 “춘천이라는 소도시를 주인공으로 하여 이 도시가 품고 있는 고독과 권태와 은밀하고 불온한 열정들을” 그리고 싶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오정희의 춘천 40년, ‘문학지도’ 그릴 때

춘천시립도서관에는 춘천 출신 작가들 코너가 있고 작품들의 배경이 되는 지명들을 표시한 지도도 있는데, 흡인력은 의심스럽다. 1996년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에서 두 권으로 된 《한국 문학지도》를 낸 적이 있다. 이때도 참신한 시도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작가들의 작품성과 관련해 춘천의 공간들을 연구하면 그를 통해 적어도 문화적인 면에서는 ‘춘천의 정수’를 찾아낼 수 있을 터다. 이는 문화도시 춘천을 업그레이드 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 내친 김에 춘천의 삶 40년을 맞는 오정희의 ‘은성한’ ‘춘천문학지도’를 한 번 그려보고 싶다.

“옛날 어느 각시가 옛 우물에 금비녀를 빠트렸는데 각시는 상심해서 죽고 금비녀는 금빛 잉어로 변해…”(〈옛 우물〉)

정승옥 (강원대 불문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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