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중1 아들이 “그 당시에 왜 시위를 한 거냐”고 묻는다. ‘독재’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아이에게 설명하기 위해 전두환을 소환하고, 광주를 소환하고, 박정희와 5·16을 소환해야 했다.

아들의 아비는 1980년대에 20대를 보냈고, 그 아비의 아비는 한국전쟁과 이승만 치하에서 20대를 보냈을 터다. 또, 그 아비의 아비의 아비는 중일전쟁과 2차대전기에, 그 아비의 아비의 아비의 아비는 경술국치에서 3·1운동에 이르는 시기에, 그 아비의 아비의 아비의 아비의 아비는 갑오농민전쟁과 대한제국기에 20대를 보냈을 게다.

100년도 더 지난 그때도 불렀을 것이다.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그날’을 목이 터지도록 불렀을 것이다. 우금치로 진격하던 농민군들의 함성소리와 3·1운동의 태극기 물결과 시베리아에서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벌판에서 풍찬노숙하던 독립군 파르티잔들의 헤진 군복들과 4·19, 5·18, 6·10의 매캐한 최루탄 속에서도 그 노래는 소멸되지 않고 간단없이 이어져 왔을 터다.

돌이켜 보면 불과 30년 전도 야만의 시대였다. 30년 전에 또 그 이전 30년 전을 볼 때 역시 그러했듯이. 어쩌면 오히려 당대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야만인지 잘 모를 것이다. 이미 그 삶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익숙해서 세상은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일본이 그렇게 빨리 망할 줄 몰랐다. 적어도 몇 백 년은 갈 줄 알았다”고 변명했다는 서정주처럼 그들 또한 전두환 독재가 그리 빨리 무너질 줄 몰랐을 것이다. 역사의 가해자는 권력이 영원할 줄로 알고, 역사의 피해자는 또 그 현실이 전복될 수 있다는 생각이 늘 무모한 ‘달걀로 바위 치기’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실상 현실은 늘 야만이다. 이명박과 박근혜 일당들을 차치하고라도 눈만 뜨면 뉴스를 장식하는 살인과 자살과 온갖 참사와 파리 목숨보다 가벼운 해고가 횡행하는 바로 지금 이 시대가 얼마나 야만적인지는 한 세대 후에야 더 실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그날’은 어쩌면 신기루 같은 것이리라. 아니 그것은 창세기 이후 수천 년을 우려먹은 ‘천국’의 도래와 다르지 않은 주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얘기보다는 그저 현실에 천착하는 게 맞는 것일지 모르겠다.

혁명의 역사는 늘 배신의 역사였다. 혁명의 주역은 실패하면 반역자가 됐고, 성공하면 새로운 지배세력이 됐다. 유럽 시민혁명의 주체는 자본가계급이 돼서 노동자계급을 착취했고, 러시아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볼세비키 또한 새로운 지배계급이 돼 민중 위에 군림했다.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소위 ‘386세대’ 또한 신자유주의의 선봉에서 이른바 ‘87년 체제’의 총아가 됐다. 그러나 이제 이 나라 백성들도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촛불세례는 일찍이 이루지 못한 시민의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각성을 한껏 고조시키는 놀라운 은총을 보여주었다.

이제 ‘천국’에 대한 환상처럼 ‘그날’에 대한 몽상도 버려야 할 때다. 그리고 이 한마디면 족하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Hic Rhodus, hic salta!)”

전흥우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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