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은 예로부터 맥국(貊國)으로 알려져 왔으나, 지난해 10월 30일 춘천박물관이 상설전시장을 재개장하며 맥국은 그림자조차 없이 지워지고 영서지역 전체가 예족(濊族)으로 환치되었다. 다산 정약용은 오랜 기간 춘천이 맥국으로 불리는 이유에 대해 〈산행일기(汕行日記)〉(《다산시문집》 제22권, 잡평(雜評))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런데 특별히 맥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한(漢)ㆍ위(魏)의 즈음에 낙랑(樂浪)이 남하(南下)하여 춘천으로 옮긴 후, 혹은 한(漢)의 관리가 파견되어 지키기도 하고 혹은 토추(土酋)가 빼앗아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낙랑의 근본은 평양(平壤)에 있었고 평양은 끝내 구려(句麗)에게 패망하였는데, 그 구려의 종족이 본래 맥과 더불어 혼합되었기 때문에 백제(百濟)ㆍ남한(南韓) 사람들이 다 같이 낙랑을 가리켜 맥인이라 불렀으니, 그 근본은 평양으로부터 왔고 평양이 당시 구려맥(句麗貊)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춘천이 낙랑의 옛 도읍지로 후에 맥족이 혼입돼 있는 구려맥(句麗貊:고구려)에 편입되면서 불리게 됐다고 했다. 백제와 남쪽의 한(韓) 사람들이 낙랑사람을 맥인(貊人)이라 불렀으며, 맥족을 기반으로 하는 고구려(구려맥)가 지배하면서 더욱 이렇게 불렸다고 했다.

이 설명대로라면 춘천을 중심으로 하는 영서지역에는 예족이 결코 자리 잡을 수 없다. 다산은 춘천의 맥국과 강릉의 예국에 대해서 두 곳이 모두 나라 명칭으로 불릴 수 있음을 단연코 인정하지 않았지만, 춘천과 강릉이 왜 맥국과 예국으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근거를 들어가며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을 통해서 춘천이 맥인(맥족)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음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또한 춘천을 기반으로 하는 맥인(맥국)은 백제와는 적대관계를, 신라와는 유대관계를 지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기록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청음 김상헌은 춘천 청평사를 유람하고 맥국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글과 시를 남겼다.

춘천(春川)은 옛날의 맥국(貊國)이다. 산수가 맑고 높아서 명구(名區)라고 불린다…조화(造化)의 교묘한 솜씨 역시 어찌 궁(窮)함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太初天子漫勞哉(태초천자만로재) 태초 때에 천자께서 부질없이 수고해서,
玄菟纔分滄海開(현토재분창해개) 현도가 나누이자 창해군을 열었다네.
休道貊城無處所(휴도맥성무처소) 맥국성의 자취 없다 말하지를 말지어다.
漢家宮闕已塵灰(한가궁궐이진회) 한나라의 궁궐 이미 모두 재가 되었구나.
- 《청음집》 제10권 〈청평록(淸平錄)〉, ‘맥도(貊都)에서 옛일을 회고하다(貊都懷古)’


춘천의 맥국이 한(漢)이 설치한 낙랑의 세력권에 있었던 것으로 청음도 인지하고 있다. 한나라 궁궐이 이미 남은 것 없이 사라졌듯이 맥국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음도 같은 이치라고 했다. 낙랑과 구려맥(고구려)의 지배 하에서 초기 고대국가 형태의 모습으로까지 성장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춘천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며 맥국으로 불렸던 것은 사실이다.

조선시대 학자는 대부분 강릉 예국, 춘천 맥국으로 인지하고 그렇게 사용해왔다. 또한 다산의 논점을 미루어보았을 때 춘천에 거주하던 종족이 예족과는 다른 맥족 중심의 일정한 세력을 가진 (국가?)형태로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춘천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영서지역이 맥족 중심으로 구성돼야 함은 분명하다.
 

허준구 (춘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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