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립극단 선욱현 예술감독

강원도립극단 선욱현 예술감독.

강원도립극단 선욱현 예술감독을 만나 3시간 동안 숨 가쁘게 얘기를 주고받았다. 연기를 보듯 실감나는 재현에 유쾌하기도 했고, 자칫 안주할 수 있을 나이이기도 한데 일에 대한 열정은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의 속도와 정비례했다.

선욱현 감독은 전남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부터 국어 교과서의 희곡을 먼저 펼쳐보는 영화광이었던 그는 배우가 꿈이었으나 부모님이 서울 진학을 반대해 연극영화과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단지 영화를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에 신문방송학과로 진학한 것이다. 때문에 학과 공부보다는 연극 동아리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배우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고교시절부터 문학 동아리에서 글을 써오던 선 감독은 대학 4학년 때 교내 문학상에서 희곡이 당선돼 극작에 대한 자신감과 성취감을 얻어 희곡과 극작 관련 서적을 뒤지면서 독학으로 희곡 습작에 매진했다. 졸업 후 바로 상경해 대학로에서 가난한 배우생활을 시작했다. 말단 배우로, 스태프로 고된 일상에서도 희곡 쓰기는 계속됐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바위가 스스로 빛을 내듯이 신춘문예에서 네 번이나 탈락해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으나, 포기를 모르는 선 작가는 1995년 스스로 세상에 우뚝 섰다.

자신의 실험적 희곡인 ‘피카소, 돈년, 두보’라는 작품을 연출해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 막이 오른 것이다. ‘피카소’는 떠돌이 화가고, ‘돈년’은 5·18 광주민주항쟁 때 고문으로 정신이상자가 돼 떠도는 여성이며, ‘두보’는 ‘돈년’이 고문당할 때 그 뒤에서 보초를 서던 군인인데, 그 죄책감으로 돈년의 옆을 지키는 시인이다. 시와 그림과 춤으로 보여주는 퍼포먼스가 정극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듣노라니 영화 ‘꽃잎’과 오버랩이 됐다.

“영화 ‘꽃잎’보다는 먼저 나왔지요. 저는 광주에서 나고 자랐어요. 저에게 5·18의 충격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죠. 그 아픔을 이 작품에 담았습니다.”

이 작품은 1997년과 1999년 앵콜 공연으로 이어졌고 지금까지 후배 연출자와 배우들에 의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선욱현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 작품이자 사랑의 결실을 맺은 작품이다.

“그런데 더 영화 같은 이야기가 있어요. 제가 그 ‘돈년’을 사랑했어요. 그녀의 춤사위가 나를 눈멀게 했어요.”

불꽃같은 사랑으로 결국 2개월 만에 화촉을 밝혔다. 199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중독자들’이 당선되면서부터 그는 극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녹번역 뒤 작은 빌라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전세집이 경매로 넘어가 1년 정도 맘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발표한 작품들이 속속 무대에 올라 그 작품 값으로 경제적인 안정도 누렸다.

“전세도 얻고, 차도 사고, 둘째 아들도 낳았어요. 둘째 아이는 큰아들과는 다섯 살 차이가 나요. 고민 끝에 둘째를 낳았지요. 우리 명호(큰아들)는 장애가 있거든요. 몸도 지능도 언어도 어린아이 같아요. 장애아를 둔 부모는 자식보다 하루만 더 오래 사는 게 소원이에요.”

명호는 발달장애, 지적장애 1급으로 선천성 16번 염색체 이상으로 루빈스테인 테이비 증후군이란다. 작은 아이에게는 짐이 될 수도 있지만 다행히도 작은 아이가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어 고맙다고 했다. 금요일 밤엔 서울에 있는 가족에게 간다. 명호가 좋아하는 기차도 타야 한다. 몇 년간 가족여행 한 번 제대로 못가서 둘째 아들과는 둘만의 여행도 계획했고 특유의 전라도 말로 “엄청 기대 되불어요잉” 했다.

같은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연출자와 배우로 만나 사랑했던 아내에 대한 존경심도 드러냈다. 두 아이를 돌보느라 힘들만도 한데, 내색하는 법이 없고 지금까지도 춤꾼으로 단 한 번도 배움과 연습의 끈을 놓은 적이 없다고 한다.

“아주 독한 사람이죠.”

‘독한 사람’이란 표현은 그간의 독한 어려움을 드러내는 표현이리라. 아내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지독히(?) 깊음을 알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14대 품바였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자 배우가 꿈이었던 그는 연기에 대한 갈증이 생길 즈음, 원조 품바 김시라 선생의 추천으로 14대 품바가 되어 2001년까지 3년간 450회의 공연을 했다. 연기를 하고 싶다는 소망은 영화와 드라마의 단역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금도 연기할 수 있는 무대라면 비중이 작은 단역도 즐겁게 참여한다며 웃는 선 감독의 표정에서 ‘진정으로 즐기는 배우구나’ 싶었다.

그는 2007년 극단 ‘필통’을 창단하고 대표를 맡았다.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하고, 강의도 나갔다. 극단의 행정처리는 물론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고충을 듣고 다독이는 일까지 해야 했다.


“다행히 체력이 좋았어요. 공연이 끝나고 새벽까지 술을 마셔도 9시면 어김없이 출근했어요.”

2013년 극단의 경제적 궁핍은 견디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돈을 털어 연습실과 스튜디오에 재투자를 하고 연습장으로 공연장으로 뛰어다니며 안간힘을 썼지만 후배들과는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때 강원도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선정돼 2014년 1월 2일 첫 출근을 하게 됐다.

“‘난 반드시 돌아간다’라는 생각은 늘 있었어요. 후배들과 헤어져 미안했고, 언젠가는 내가 힘이 되리라 했는데, 정말로 그런 일이 생겼어요.”

2015년 연극 ‘돌아온다’가 서울 연극제 우수 작품상과 연출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필통’에 미약하나마 힘이 될 수 있었다. 쑥스러운 듯 미소를 머금었다.

‘돌아온다’의 주 무대는 시골의 식당이다. 내부엔 ‘여기서 막걸리를 마시면 그리운 사람이 돌아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 소문을 듣고 모여드는 사람들과 그 마을에 거주하는 단골들. 그들이 식당을 오고가며 막걸리를 마신다. 이들은 진한 기다림이자 그리움을 마시고 간다.

‘돌아온다’를 영화로 제작한 허철 감독은 지난해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취재 중에 좋은 소식도 함께 들었다. 한국극작가협회에서 시상하는 올해 제1회 극작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 상은 20년 이상 꾸준히 활동해 온 극작가에게 원로선배들이 주는 상이기에 인정을 받는 것 같아 더욱 기쁘다는 소회를 밝히는 선 감독. 강원도립극단 감독직도 2년간 연임하게 됐다. 창단 초창기에는 연극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을 관심으로 이끌어 내고자 직접 포스터를 붙이며 시민들과 얘기를 나누는 등 발로 뛰는 고단함과 함께 타향에서 겪는 어려움도 많았지만, 속초·강릉·원주 등 마다하지 않고 극단의 대표를 만나고 공연도 보며 연대의 장을 만들었다.


그는 우직하게 한 곳만 바라보았다. 세상에 대한 화도 원하던 소망도 한껏 연극에다 풀었다. ‘돌아온다’ 희곡집 서문에서 그는 “그때는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젠, 세상과 더 가까이 앉아 이야기를 풀어야겠습니다. 나귀처럼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가는 나귀가 그려진다. 툰드라의 대자연에는 순록이 살고, 그 원시성은 그에게 생명력을 준다고 했다. 툰드라는 아니지만 “춘천에서 만난 사람들이 앞으로 저의 삶의 근간이 될 거에요”라며 앞으로의 삶의 여정도 춘천에서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우연히 오게 된 춘천은 아닌 듯싶다.

 

 

 

김예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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