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 이거 필요하냐? 안 쓰면 나 가져가도 돼?”

캄캄한 쓰레기소각장 바닥을 요란하게 헤집는 손전등 불빛 사이로 검은 손이 불쑥 내가 오늘 아침에 버린 기출 문제집을 들이밀었다. 책표지에는 내 소망이 적힌 ‘2018 수능 만점자 박00’라는 익숙한 손 글씨가 어렴풋이 보였다. 나는 이미 재수라도 하게 된 듯 꺼억꺼억 울음을 삼키다가 문제집을 낚아챘다. “헐! 내가 그거 찾고 있었어! 고마워.” 누가 빼앗기나 할 것처럼 나는 그 문제집을 꼭 껴안고 다시 책 더미를 훑기 시작했다. 저 멀리 들리는 선생님의 목소리…. 모두 시청각실로 모이란다. 어라? 조금 전 지진으로 흔들리던 학교 건물은 이젠 미동도 없고, 새까만 밤하늘엔 밀려드는 내 원망의 눈물 같은 별무리가 쏟아지고 있었다.

# 수능 하루 전날

기숙사생 고3들은 수능 대비 특별매뉴얼에 따라 하루를 시작했다.

먼저 오전 5시 40분에 기상해 첫째, 1교시 국어영역이 8시40분에 시작되므로 3시간 전 뇌 깨우기. 둘째, 수능 D-1인 오늘을 완벽히 보내기 위해 전 과목 전 범위를 정리해둔 파일묶음을 들고 교실동으로 향하기. 이미 일주일째 우리는 이 매뉴얼에 따라 자동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셋째, 7시 40분 조식 후 8시까지 양치를 마치고 면학실 의자에 앉기. 파일묶음을 한 장 한 장 마지막으로 읽으며 암기한 내용은 두꺼운 유성매직으로 아주 과감하게 쭉쭉 그어 없애기. ‘아, 하루만 견디면 된다!’ 오후 2시, 우리는 수험생 유의사항 동영상을 보기 위해 시청각실로 이동했고, 수험표와 신분증을 확인한 뒤 같은 수험실에 배정된 친구들과 흥분된 목소리로 재잘거리며 대단원의 마무리.

어둠이 내리자 우리는 서로의 눈빛 속에서 예전에 없던 불안과 긴장감에 사로잡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순간에 전 과목을 다시 한 번 정리해야겠다고 한 나는 내 자신이 너무도 기특하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매뉴얼에 따라 기숙사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그 시각 오후 8시 30분. 친구들이 몰래 소지하고 있던 휴대폰들이 동시에 ‘긴급재난문자’ 알림을 울려댔다. 그리고 우리에게 들이닥친 지진보다 더 무서운 천재지변, “얘들아 수능 연기됐대!”

# 다시 시작된 수능 D-7

지난해 11월 15일, 포항시에 큰 지진이 들이닥쳤다. 여진은 고3의 인생에도 금을 내었다. 열아홉 살, 오직 수능만을 바라보며 지난 3년을 참고 참아 온 이 가엾은 청춘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컥컥’ 울음을 터트렸다. 교실은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어쩌랴! 사상초유로 수능은 연기됐고, 수능이 끝나자마자 학교를 떠나기 위해 짐을 꾸려놓았던 우리는 일주일이라는 알 수 없는 시간여행 속에 머물게 돼버렸다. 몇 시간을 넋 놓고 있던 우리는 이 가혹한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아니, 여기서 머뭇거리면 안 되지. 일시에 우리는 소각장으로 달려갔다. 마치 선착순 달리기라도 하듯이. ‘그렇다. 오늘 아침에 버린 문제집, 너희들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

기숙사의 짐을 다시 풀어야 했고, 이미 깔끔하게 정리된 학교식당에는 쌀과 부식이 없어서 당장 내일 식사를 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수험실은 통제돼 식당에서 담임선생님과 조회를 하는 이상한 여행코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우리들은 ‘무엇이 중한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무서우리만치.

# 위기의 순간을 대하는 고3들의 자세

고3 기간 동고동락한 학교 친구들, 기숙사 생활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생위기’를 맞은 우리는 서로 다른 대처방식으로 인생여행에 돌입했다.

먼저, 엄청난 소식에 아슬아슬하게 유지해오던 긴장감을 확 놓아버리는 자포자기(自暴自棄)형 친구들. “오늘 무슨 공부가 되겠어?” 허탈하게 웃던 친구들은 상황이 정리되자 곧바로 기숙사로 향했다. “내가 컨디션 관리한답시고 2주를 놀았는데, 일주일을 더 놀아야 돼!” 이들은 친구들에게 7일 동안 그야말로 독이었다. “지금 공부해 봤자야~”라며 내가 그나마 열심히 풀고 있던 수학문제마저 내려놓게 하는 민폐 캐릭터들. ‘이 친구들의 마음속도 정말 편할까?’

이와는 달리 위기를 도전의 기회로 여기는 ‘운외창천(雲外蒼天)’형 친구들. 문자 그대로 ‘구름 너머에 있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내 짝꿍이 그런 부류였다. “오늘 아침에 내가 제발 하루만 더 주세요. 이렇게 기도했는데, 세상에! 무려 7일이나 더 주셨어!”라며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아, 진심으로 부러웠다. 뇌 구조가 어떻게 생기면 매사에 저렇게 감사와 성실이 넘칠까. 그 친구는 7일 내내 “지난주에 수능 봤으면 어쩔 뻔!”이라는 말을 수시로 달고 다녔다. ‘그 친구, 정말 7일 동안 공부한 내용이 수능에 나왔을까?’

마지막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수불석권(手不釋卷)형. 수능 2주 전부터 컨디션 조절을 운운하며 대부분의 아이들이 기숙사에 일찍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이 친구는 졸음을 참아가며 매일 밤 12시까지 면학실을 꿋꿋이 지켰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느 때처럼 제일 먼저 면학실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 뒷모습이라니!

어쨌거나 우리는 전혀 반갑지 않았던 7일간의 시간여행을 나름의 방식대로 통과했다. 나는 어떤 유형의 고3이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반에서 가장 늦게까지 울며불며 이 세상 저 세상을 원망하던 나는, 퉁퉁 부운 얼굴로 제일 먼저 면학실로 뛰어간 아주 평범한 일인이었다. 그리고 바로 짝꿍과 함께 전 과목 정리노트를 몇 번이고 탐독했고, 다시 고3 매뉴얼에 따라 하루하루를 보냈다.

드디어 수능시험을 마쳤다. 그러나 가채점을 하면서 내 인생에 거대한 지진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음을 알았다.

박현주 (20·예비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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