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아버지의 옷장 속은 늘 변함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매번 옷 좀 사 입으라고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옷장 속 코트에서 세월이 묻은 오래된 먼지를 툭툭 털면서 “지금 있는 옷들도 충분히 입을 수 있다”며 머쓱한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늘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우리 가족은 부모님, 오빠와 남동생, 할머니, 그리고 나까지 여섯 식구로, 모두가 한 집에 같이 살고 있다. 그 중 나와 동생은 세상에 늦게 나온 늦둥이다. 빠듯한 생활이었지만, 아버지는 다른 건 몰라도 나와 동생에게 공부만큼은 남들처럼 부족함 없이 시키려고 많이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불만사항이 있었다. 남자 형제만 있는 나는 항상 친오빠의 옷이며 양말을 물려받았다. 아이들은 금방 성장하기 때문에 옷을 살 필요가 없다는 어머니의 생각 때문이었다. 만약 사게 되더라도 항상 남동생의 몸에 맞게 사왔다. 그래서 당시에는 새 옷을 갖고 싶기는 했지만, 멋을 부리고 싶다는 마음은 크게 들지 않아 운동복 바지에 오빠나 남동생이 신던 회색 양말을 신고 다녔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외모에 관심이 부쩍 많아지는 사춘기가 찾아왔다. 다른 친구들처럼 예쁘게 치마도 입어보고 싶었지만, 내 옷장에는 온통 남자 옷밖에 없었다. 어느 날 나와 동급생인 한 남자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너는 왜 만날 똑같은 옷만 입어?” 그 말을 들은 순간 아무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내뱉은 동급생 남자아이에게 화도 났지만 무엇보다 내 옷장에 운동복밖에 없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집에 가자마자 입을 옷이 없다며 지하상가에 가서 옷을 사 달라고 부모님에게 조르곤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옷이 있는데 왜 사냐면서 오히려 징징거리는 나를 혼내기만 했다. 그때 가만히 있던 아버지가 토라진 내 모습을 한동안 쳐다보더니 안쓰러웠는지 옷을 사 주겠다고 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재빨리 밥을 먹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버스를 타고 지하 쇼핑몰로 갔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아버지 마음도 모른 채 신나게 옷을 쇼핑했다. 그때 내 마음에 쏙 드는 니트를 발견했다. 니트 가격은 4만3천원. 그 당시 4만3천원은 큰 금액이었다. 가격표를 본 아버지는 살짝 망설이긴 했지만 흔쾌히 사주셨다.

쇼핑을 하고 집에 가는 길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엄마의 꾸지람도 무서웠지만 더욱 무서웠던 건 비싼 니트 가격이 아닌가 싶었다. 집에 도착한 나는 반품을 할까 방에서 혼자 고민했다. 그때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니 옷 사준 기념으로 안마를 해달라고 부탁하셨다. 나는 말없이 아버지의 어깨를 주물러드렸다. 그때 아버지는 내 얼굴을 슬쩍 보더니 “우리 딸이 입으니 너무 예쁘다”, “옷이 주인을 찾았다”며 오히려 나를 다독이셨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딱딱하게 굳어버린 아버지의 어깨를 안마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버지의 어깨를 주무를 때마다 세월의 흔적이 많은 옷깃이며 구멍 난 양말로 인해 아빠의 속살이 훤히 보였다.

순간 흐릿하게만 보이던 시야가 안경을 쓴 것처럼 아버지의 옷차림이 내 눈앞을 가로막았다. 그때 이후로 나는 옷을 사달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 니트도 많이 낡고 헤져서 버릴 지경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내 옷장 속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그 니트를 볼 때마다 그 당시 옷을 사달라고 했을 때 망설이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철없던 내 어린 시절에 눈물이 얼룩처럼 깊게 번진다. 그동안 아버지는 여섯 식구의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딸의 옷만 사줄 줄 알았지 정작 자신의 옷을 사는 건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저 자신을 위해서는 쓰디 쓴 소주 한 잔과 김치에 아버지라는 무게를 녹여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한평생 제 자식 밥그릇에만 목숨을 걸었던 우리 아버지. 아버지가 알려준 방법, 이제부터는 내가 아버지에게 고스란히 알려주고 싶다.

유예진 (온의동·한림대 법학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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