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간의 노동으로 몸도 마음도 파김치가 된 주말 아침. 소파에 널브러져 오늘 하루 맘껏 게으름을 피워보리라 마음먹고 있던 그때, 미처 소파에 엉덩이도 걸치기 전에 “엄마아~” 딸의 혀 꼬부라진 소리가 들렸다. 대개 엄마들은 자식들이 부르는 같은 발음기호의 ‘엄마’ 소리에도 수많은 차이가 있다는 걸 안다. 오늘의 ‘엄마’는 뭔가 또 귀찮은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소리란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난 ‘오늘도 틀렸구나’ 생각하며 딸아이와 옷을 사러 명동으로 나갔다.

나는 이전에도 옷을 산 적이 있는 한 매장으로 불쑥 들어가 휘휘 건성으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이어 ‘아차!’ 딸아이하고는 맞지 않는 곳이란 걸 깨닫고 길쭉하게 이어진 매장을 서둘러 지나치고 있었다.

그곳은 몇 개의 코너가 좁은 통로를 통해 이어져 있었고, 그 세 번째 코너로 연결된 골목을 막 지나가려 할 때였다. 통로는 성인 두 명 정도가 어깨를 비스듬히 해야만 겨우 스쳐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나는 통로에서 마주 오던 사람과 딱 마주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오른쪽으로 가려하면 상대방도 동시에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내가 다시 왼쪽으로 가려 하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서너 번을 말 그대로 ‘우왕좌왕(右往左往)’하기를 몇 분이나 흘렀을까. 난 속으로 ‘이런 난처하고도 우스운 상황이 나한테도 일어나는구나’ 생각하며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고개를 들고 어정쩡하게 웃으며 “제가 이쪽으로 갈게요”라고 말했다.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엔 그저 당황스런 마음에 상대방을 똑바로 보지 못했으나 얼핏 참 낯이 익다는 생각을 했고, ‘저 사람도 퍽이나 속없이 웃는구나’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멈춰 서서 고개를 들고 상대방을 똑바로 마주한 순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 분명히 아는 사람 같긴 한데 한편으론 너무나 낯선 얼굴. 어설프게 웃고는 있지만 그쪽도 뭔가 당황스러운 듯한 표정.

나는 식은땀이 났다. ‘안면 인식장애’까지는 아니지만 유난히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핸디캡으로 인해 길에서 누군가가 날 보고 웃으며 걸어오면 나는 식은땀부터 나곤 했다. ‘누구더라?’ 상대방과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나의 CPU를 풀가동해 집중적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검색하기 시작한다. 이곳은 어디고, 그러므로 내가 이곳에서 만날 가능성이 있는 그룹의 사람들을 빠르게 스캔하고, 그러고도 일치하는 인물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거리까지 오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일단 마주치고 ‘안녕하세요?’까지만 하고 상대방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상대방으로부터 단서가 될 만한 유의미한 단어가 나오기라도 하면 나는 그 즉시 그 단서를 키워드로 해서 다시 제2의 검색에 들어간다. 거기까지 해서 다행히 답이 나와 준다면 그날은 선방이다.

어떤 날은 꽤 한참 동안 얘기를 주고받고도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헤어져 집으로 가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은 며칠 동안을 머리에 쥐가 나도록 추리에 추리를 거듭하고, 그러다 요행히 답이 나오면 그제야 한시름 놓고 그 괴로운 인물검색 시간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런데 그날은 검색을 할 시간이나 거리도 확보하지 못한 채 떡하니 맞닥뜨려버린 것이다. 게다가 상대방도 나처럼 당황하지 않는가? 이런 낭패가 또 있을까. 더구나 상대방도 아무런 단서가 될 만한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동자만 불안스레 움직이는 것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에라 모르겠다.’ 상대방을 알든 모르든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다는 생각에 모르는 척 정색을 하고 다시 한 번 “제가 이리로 가죠”라며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순간, 아차! 그녀가 입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남색의 겨울 외투.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순간 그녀가 누군지를 알아챌 단서를 찾은 듯싶었다. 그 옷을 토대로 난 찰나의 시간을 이용해 또다시 검색모드로 돌입했다. 아~. 나는 그제야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 내가 절대로 몰라서는 안 되는 얼굴, 잊어서도 안 되고 잊을 수도 없는 얼굴이었다. 나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고, 악몽에서 깨어나기를 바라듯 머리를 흔들어댔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나는 그 시절 무슨 유행가나 되는 듯 읊고 다녔던 말이 있다. ‘자기 객관화’. 그 말이 이렇게 끔찍하고도 무서운 경험인 줄을 나는 그날 알게 되었다. 그 옷가게는 세 개가 좁은 통로로 이어져 있었고, 나는 그 마지막 통로가 아닌, 거울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내 앞에 떡하니 서있는 그 익숙한 듯 낯선 얼굴은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쉽게 자기 객관화라는 말을 하고 또 쉽게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을 타인이라고 생각하고 바라볼 수 있는 완벽한 ‘자기 객관화’의 경험은 흔치 않을 것이다.

몇 년이 지난 아직도 나는 그 생생한 느낌에 몸서리친다. 내가 죽어서 나 자신을 내려다본다면 그런 느낌일까? 아님 나의 분신을 본 느낌이 이럴까? 내 이야기를 들를 지인들은 그 기막힌 반전 드라마에 한동안 미친 듯이 웃어재꼈고, 그 웃음이 잦아들 무렵이면 그네들은 한결같이 그 웃음의 양만큼의 허허로움을 얼굴 가득 보이며 ‘개그콘서트보다 더 웃긴데, 왜 이렇게 슬프냐’라며 쓸쓸해 한다.

모두가 자기의 길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걸어가고 있는 한낮의 시내 거리에서 혼자만이 허우적거리며 거울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중년 여성의 모노드라마는 아마도 우리가 언젠가 만나게 될지도 모를 ‘치매’라는 괴물의 모습과 닮았다고 여겼음이리라. 나 역시 그 섬찟한 충격으로 인해 나도 언젠가 이렇게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 시시덕거리며 거리를 배회하면서 세상으로부터 밀려나와 삶의 변두리에서 겉돌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으로부터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날의 기억은 좀 다른 방향으로 나에게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그날 보았던 내 모습의 낯설음은 과연 어디에서 온 걸까.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본다. 거울 속에서 우리는 눈썹을 그리고 얼굴에 돋은 뾰루지를 힘껏 쥐어짜기도 하고, 옷매무새를 고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생각해 보니 우리가 거울을 볼 때면 항상 자신이 보고 싶은 어떤 부분만을 보아왔던 것 같다. 자신의 전체를 보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 자신의 전체….

우리는 수없이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면서도 거울을 통해 나의 총체적 진실이랄 수 있는 정체성의 모습을 보려고는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날의 낯설음은 ‘자신의 총체적 모습’에 대한 낯설음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살면서 몇 번이나 자기 자신과 낯설게 대면하게 될까.

생활 때문에, 현실 때문에 라는 자기변명과, 치열한 사회의 경제논리에 치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살다가 어느 날 불현듯 마주하게 되는 낯선 자기 모습. 우리는 그 모습이 두려워 자꾸만 자꾸만 좀 더 깊숙이 현실의 늪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젊은 시절 주문처럼 외우고 다녔던 유치환 시인의 <생명의 서>에서처럼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밤마다 고뇌하고 방황하는 알라의 신’은 못 될지라도, 이따금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소박한 일탈이라도 꿈꿔보는 용기쯤은 가지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조심스레 해본다.

박지영 (57·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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