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여성민우회 정윤경 상임대표

살아가다 보면 마치 번개가 치듯 어느 한 순간 강렬하게 우리의 삶을 깨우고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하는 인연이나 계기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책의 한 구절이거나 사건일 수도 있다. 내게는 ‘여성민우회’가 그랬다. 서울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여성 ‘한부모’들과의 작업을 위해 처음 만난 ‘여성민우회’는 ‘다양성’과 ‘수평’이라는 단어로 다가왔다. ‘아무개 부장님’, ‘아무개 회장님’ 같은 직급 대신 서로의 별칭을 부르고, 말끝에도 존대어를 굳이 붙이지 않았지만 서로 간에 존중이 느껴졌다. 직급이나 나이의 무게가 덜어진 자리만큼 편안하고 자유로운 대화가 채워졌다. 명백한 위계와 형식적 존칭으로 질서 지워진 일반 사회와는 달리 우리를 둘러쌌던 따뜻함과 해방감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된다.

‘춘천여성민우회’도 내년이면 어느새 20주년을 맞는다. 그 사이 많은 선배 여성들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이름도 낯선 ‘여성운동’을 해왔다. 지난 1월에는 새로운 상임대표로 정윤경 씨가 선출됐다. 그녀가 함께 만들고 싶은 새로운 세상과 여성민우회는 어떤 모습일까. 여전히 낯설고 때론 거부되는 여성주의 이름표를 전면에 달고 살아가기로 한 그녀의 삶은 또한 어떠했을까. 질문과 궁금증을 품에 가득 안고, 날리는 눈발을 헤치며 그녀가 기다리는 찻집 문을 연다. 그녀가 차분한 웃음으로 맞이한다. 이제 그녀를 만날 시간이다.

우리가 민우회에서 만난 지도 꽤 되었지요? 벌써 10여년은 된 듯해요. 정 대표님은 그때 춘천으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던 거 같았는데요. 민우회와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지요?

맞아요. 남편이 직장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이사를 했는데, 딸아이와 같은 반 학부모였던 김영준 씨를 만나 텃밭 가꾸기를 하다가 민우회를 소개받았어요. 당시에 민우학교에 참여했는데 여성주의를 접하면서 저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지요. 오한숙희 씨의 강의가 크게 인상에 남았어요. 그동안 사회가 만들어놓은 길을 순응하며 걸어왔고, 불만스럽기는 해도 대체로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구나. 사회와 부모, 가족이 기대하는 ‘만들어진 여성’으로서의 ‘정윤경’으로 살아왔구나. 이렇게 정면으로 제 삶을 들여다보니 불편하기도 하고 자유롭기도 했어요.

나도 여성주의가 준 해방감만큼이나 내가 추구하는 삶과 내가 속한 세상과의 괴리, 그것을 깨지 않고 대충 안주하려는 나 자신에 대해 혼돈과 불편의 기억이 있어요. 정 대표님은 여성주의와 민우회를 만나고 나서 어떤 점들이 불편하고, 또 달라졌을까요?

축제극장 몸짓 공터 벼룩시장에서 성 평등 캠페인을 하는 민우회 회원들.

저희 집도 그렇고 시댁도 상당히 가부장적인 풍토가 있었어요. 심지어 밥상도 남녀가 따로 차려 먹었으니까요. 저희 집의 중심은 늘 남동생이었어요. 딸들은 사과 하나를 나눠먹는 게 당연했다면, 남동생은 혼자서 한 개를 전부 먹는 게 당연했지요. 아들이고 귀했으니까요. 게다가 저는 장녀여서 더 배려하고 참는 것이 미덕인 것으로 알고 자랐지요. 그런데 결혼을 하니 시댁도 만만치 않았어요(웃음). 뭔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어도 침묵했지요. 그러다가 마치 새로운 세상을 만나듯 여성주의를 만나고 나니 당연한 것들에 대한 불편이 불쑥불쑥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바꾸는 건 좀처럼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서 저녁준비를 하는데 아들이 그러는 거예요. “엄마랑 아빠랑 다 같이 일하고 들어왔는데, 왜 아빠는 TV 보고 엄마만 일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 크게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지요. 그때부터 ‘아, 말을 해야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남편에게 비난 대신 아이의 문제제기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딸이 혼인해서 퇴근해 돌아왔는데, 사위가 아무것도 안 하고 밥 차리기를 기다리고만 있으면 어떨 것 같아?” 그렇게 남편에게 생각할 틈을 주니까 남편도 지금은 많이 바뀌었어요. 언젠가 남자 조카가 우리 딸이 설거지 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시집가도 되겠네”라고 했는데, 남편이 “무슨 그런 말을 하냐”며 핀잔을 주더라고요. 설거지를 여성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조카에 대해서 뭔가 부당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이제는 가사일도 온 가족이 적절히 나눠요. 가장 큰 기준은 ‘불편한 사람이 먼저! 시간 있는 사람이 먼저!’입니다(웃음). 그래서 우리 집에선 아들의 일, 딸의 일이 따로 없어요.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이 환해진다. 가부장적인 삶의 양식을 순종하듯 받아들이며 살아왔던 여성 ‘정윤경’은 그렇게 생활 속에서 여성주의를 실천하는 ‘활동가’가 되어 갔다. 최근 들어 민우회는 소모임 중심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현재의 활동과 구상하고 있는 활동이 궁금했다.

먼저 ‘건강과 환경을 부탁해’를 소개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처음에는 성교육과 면 생리대 만들기 체험을 하는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인데 아파트 중심으로 지역주민이나 생협 공간으로 확대하고 있어요. 또 초등학생의 생활 속 성평등 실천 캠페인 ‘해보면’도 있어요. 동영상을 보면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차별적인 장면을 찾아 자신의 생각을 전개하도록 한 다음 다음번 만날 때까지 자신이 해볼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정해서 해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회기가 거듭될수록 아이들의 변화가 느껴져요. 그 가운데 어떤 남자아이는 상당히 표현이 과묵하고 동시에 행동은 과격했는데, 알고 보니 부정적인 감정표현을 계속 차단당했더군요. 이를테면 ‘남자는 울면 안 돼! 강해야 해!’ 이런 말을 계속 들어왔던 거예요. 슬프거나 속상한 감정이 있어도 울면 안 되니까 사회적으로 남자들에게 더 허용도가 높은 폭력성으로 나타난 거죠.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그 아이도 많이 유연해졌어요. 또 소모임 가운데 ‘따뜻하고 솔직하게(따솔)’라는 여성주의 인문학 공부모임이 있어요.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차별적인 구조로 인해서 침묵당하고 억압당했던 사람들에게 고유의 언어를 만들고 바꾸고 지지하는 모임입니다. 많은 여성들이 “해야 할 일을 하느라고, 하고 싶은 것이 뭔지 모르겠다”고 해요. ‘따솔’은 서로 책을 읽고 나누면서 자신이 꾹꾹 눌러왔던 삶의 이야기에 목소리를 입혀주는 곳이에요.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지만, 설령 못 읽었다고 해도 그냥 오셔도 되요.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텍스트가 필요 없거든요. ‘밥보다 법’도 민우회가 야심차게 시작한 법 공부모임입니다. 헌법 전문을 읽고 관련된 법 서적 3권을 읽었어요. 법을 몰라서 받는 부당함부터 법조문 자체의 성차별적 구조, 명시는 되었지만 지켜지지 않은 법규들을 발견하죠. 그밖에 꾸준히 생리대 만들기도 하고, 여성주의 글쓰기 모임과 월 1회 이상의 현장 캠페인도 계획하고 있어요.

와, 이야기를 듣고 보니 활동이 참 풍성하네요. 저도 회원이지만 반성도 되고요. 회원이지만 참여를 머뭇거리거나 아직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어떤 말로 청해보시겠어요?

우선, 관심 있는 소모임 활동부터 권해요. 꼭 회원이 아니어도 들어보시고 함께 하다보면 마음에 힘이 생기는 것을 경험하게 될 거예요. ‘따솔’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어요. 고정관념과 타인이 부여한 자기 틀을 깨는 과정이 힘들지만 아주 흥미롭습니다. 나 혼자서는 변화하기 어려워요.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해지죠. 매번 저도 느껴요. 함께의 힘이 얼마나 아름답고 강한지요. 민우회 문턱은 낮습니다. 성큼 들어오세요~

2018년 새로 상임대표를 맡으면서 구상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요?

‘거리에선 페미니즘, 거리에선 민우회’ 캠페인을 자주 하려고 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청소년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미래를 사는 게 아니라 현재를 살고, 그 현재를 모두 차별 없이 살아야 해요. 나이 들면 바꾸기도 어렵구요. ‘해보면’ 캠페인도 확장시킬 겁니다. 민우회를 알게 되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같이 하니까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감히 새로운 생각과 실천을 해볼 힘이 생겨요. 또 올해 선거가 있는 만큼 성이 평등한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번 선거에 맞춰 새로운 성 평등 지표를 만들고, 생활공간에서부터 성 평등 의제를 발굴하고 공론화할 계획입니다.

두 시간 동안, 민우회와 함께 한 10여년의 세월과 자신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그녀는 참으로 따뜻하고 솔직했다. 그녀는 딸에게 당부한다. “네가 원하는 길을 가라! 눈치 보지 말고 타인의 잣대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도 던진 말이 아닐까 싶었다. 아들에게는 “따뜻한 인간이 되어라. 모든 감정을 다 느끼고 누리고 자유로워라!”라고 한다. 다른 것 같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 되어 살아가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내게도 그랬지만 여성주의는 자기의 결을 찾아가는 또 다른 길을 안내한다. 새로운 길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당당히 한 발 한 발 내딛는 정 대표 곁에 마음을 나란히 세운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해지니까!

허소영 시민기자

춘천여성민우회 정윤경 신임대표가 추천하는 여성주의 인문서

▲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 이갈리아의 딸들
▲ 아내가뭄
▲ [시선집] 슬픔에게 언어를 주자
▲ 페미니스트 파이트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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