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문신 최여(崔洳)에 대해서는 충렬왕 16년(1290년) 5월 좌사보(左思補) 등을 역임한 사실만 알려져 있다. 최여는 시를 잘 지었던 것으로 보이며 임금의 명을 초하는 관리였다. 최여가 언제 춘천을 다녀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대표적 시문선집인 《동문선》에 두 편의 시가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춘천과 관련된 〈춘일 소양강행(春日昭陽江行)〉을 소개한다.

이 시는 30구(句)나 되는 장편시로 봄날 소양강을 중심으로 풍경이 담겨 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길게 동장군의 맹위를 느끼고 보니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간절함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800여 년 전 봄날의 춘천 모습을 시를 통해 상상해보고자 한다.

시의 앞쪽 내용은 대강 이렇다. “음력 1월 소양강가에 푸른 산 빛이 비치고 버들개지는 바람에 하늘거리는 때에 춘천에 찾아드니, 지금은 의암호에 가라앉은 소양강 백로주(白鷺洲)로 자양강과 소양강이 두 갈래로 흘러들어온다. 백로주가에 한참 서 있다 보면 흰 물새가 날며 지는 해 시나브로 전성기 때에 소양정에는 음악이 울렸을 터인데, 번화함은 한 번에 쫓겨 가고 강가에 풀과 꽃은 변함없이 해마다 피어난다. 붉게 화장하고 강물에 얼굴을 비추어보던 소양강처녀는 나이 들어서 어디로 갔으며 빨래터 강돌엔 이끼만이 꼈구나.”

吾人年少好遊樂(오인년소호유악)
우리 젊은 시절 놀며 즐기기를 좋아하여,
每逢勝景輒忘廻(매봉승경첩망회)
좋은 경치 만날 때마다 돌아가기를 잊었네.
鸚鵡洲邊木蘭棹(앵무주변목란도)
앵무주 강가에서는 목란의 노를 젓고,
鳳凰臺上黃金杯(봉황대상황금배)
봉황대 위에서 황금 술잔 들었다.
自從身嬰利名累(자종신영리명루)
몸은 이익과 명예에 얽혀서 따르고부터
十載蠢蠢趨塵埃(십재준준추진애)
십 년 허덕허덕 먼지구덩이를 달렸구나.
如今按轡水雲界(여금안비수운계)
지금 구름 내려앉은 경계에서 말고삐 놓고
坐使逸想凌蓬萊(좌사일상릉봉래)
앉자 인간세상 벗어나 신선세계 능가하네.
此江無盡眞聲色(차강무진진성색)
이 강의 참된 소리와 경치 다함이 없으니
休導關東多寂寞(휴도관동다적막)
관동으로 이끌며 적막함 많다고 마시게.
誰將醉墨語江風(수장취묵어강풍)
취한 먹으로 강바람을 읊는 이 누구인가?
紫薇花下草綸客(자미화하초륜객)
자미화 아래서 임금님 명을 쓰던 나그네라네.


젊은 시절 놀고 즐기기를 좋아하던 시인이라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떠날 줄 모른다. 이런 시인이 소양강의 최고 경치인 백로주 물가에서 배를 타고 봉황대에 올라서 술을 마신다. 소양강가 봉황대 위에서 황금술잔을 들던 시인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본다. 이익과 명예만을 따른 10년의 세월이 참으로 꿈틀거리는 버러지처럼 허덕허덕 먼지구덩이를 달려온 것임을 깨닫게 된다. 지금 구름 내려앉은 소양강가에 말고삐 내려놓고 앉으니 이곳은 신선세계를 능가하는 이상향이다. 이곳이 이상향이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시인은 소양강의 다함이 없는 참된 소리와 경치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점은 매월당 김시습이 소양강에서 명예와 삿된 이익을 던져버리겠다고 선언한 것과 아주 흡사하다. 봄내[春川]는 소양강을 가리킨
다. 소양(昭陽)은 아침햇살이란 뜻이고, 방위로는 동쪽을 말한다. 그러니 소양강을 순 한글로 풀면 봄내이고, 이를 한자로 다시 전환하면 춘천(春川)이 된다.

봄이 오는 소양강은 삿된 이익과 명예를 내려놓게 할 만큼 명징(明澄)하다. 소양강은 무한한 어머니의 따뜻한 품과 같아서 겨우내 찌들고 오그라들었던 마음을 풀어주는 생명의 젖줄이다. 소양강의 본원은 무섭게 차가운 한기로 가득했던 겨울을 밀어내고 뭇 생명을 움트게 하는 근원이라는 점에 있다. 세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봄이 오는 소양강스카이워크를 올라보면 어떻겠는가!
 

허준구 (춘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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