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50년, 춘천살이 40년 소설가 오정희

올해로 등단 50년을 맞은 오정희 작가. 오 작가는 춘천에서만 40년을 살며 춘천의 풍경들을 작품 속에 담아냈다. 
김예진 시민기자

춘천에 거주하면서 작품활동을 해온 오정희(71) 작가의 등단 50주년을 기념해 ‘문학과지성사’에서 지난해 말 《오정희 컬렉션》을 출간하면서 작가의 춘천살이 40년도 더불어 화제가 되었다. 오정희 작가는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독일 리베라투르상 수상작가로서 한국 현대 여성소설의 원류이자 ‘작가들의 작가’로도 불린다.

작가를 인터뷰하기로 결정하고 책장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작가의 책을 찾아냈다. 1979년 이상문학상을 받았던 〈저녁의 게임〉과 1994년 ‘현대문학’에서 발간한 ‘올해의 좋은 소설’ 속의 〈옛 우물〉이다. 책벌레라도 나올 듯 누렇게 변색된 종이 위에 세로쓰기로 조판된 활자에서 세월의 더께를 깨고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옛 우물〉을 읽었을 때는 30대 초반이었다. 결혼 후 안온했지만 어른으로서의 막중한 책임을 회피하고 자기만의 공간으로 숨고 싶은 불온한 욕망을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용서받고 위로받았던 기억도 새삼스러웠다.


이른 아침, 밤새 내린 진눈깨비 때문에 언덕에 있는 약속장소로 오기 힘들지 않겠느냐는 작가의 전화를 받았다. 30여 분 빨리 변경된 장소인 퇴계동 큰길가에 있는 카페에 도착했다. 동경하는 작가를 처음 만난다는 설렘과 큰 작가를 인터뷰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작가의 책을 앞에 두고 성과도 없이 잠을 설쳤었다. 분홍빛 폴라티와 모직조끼에 목공예로 다듬어진 브로치가 인상적이었던 작가의 모습은 편안하고도 고왔다. 책 발간에 대한 축하인사를 뒤로 한 채 가끔 작품의 배경으로 짐작되곤 하던 작가의 춘천살이에 대한 궁금증부터 풀어보기로 했다. 40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 속에서도 춘천 안에서 작가의 발걸음은 눈에 크게 띄지는 않았었다.

강원대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춘천으로 이주했던 것이 1978년이었어요. 춘천에 처음 내려왔을 때 큰아이가 돌 전이었지요. 글을 쓰고 아이 돌보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힘들고 꽉 찼었어요. 아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다 보니 여러 조건상 밖에 나오기가 힘들었지요. 사실 또 작가는 절대적으로 자기 공간과 시간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자기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게 되잖아요.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면서 작품활동을 위해 사투를 벌였지요. 그렇게 살다 보니 그동안 또 그렇게 사는 사람으로 알려지기도 했고요.

 

 

 

 

 

〈비어있는 들〉, 〈옛 우물〉, 〈파로호〉 등 작가의 작품을 보면 강과 안개 등 춘천을 연상시키는 풍경들이 스며들어 있다. 춘천이라는 공간은 작가의 작품활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처음엔 낯설고 외로웠지요. 이후로 이 도시에 정착해 사는 동안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관찰하는 자’로서 바라보고자 노력했어요. ‘깃들면서, 길들여지지 않으면서’라는 말이 있잖아요. 익숙해진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있었어요. 안온함, 편안함, 익숙함에 길들여지는 것을 경계했지요. 작가는 모름지기 당연한 사실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면서 이면에 무엇이 있나 항상 생각하거든요. 대지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하지만 뿌리를 내리고 나면 변화를 두려워하게 되죠. 그럼에도 ‘생활반경과 사고반경은 비례한다’는 말을 하잖아요. 춘천은 내가 사는 곳이고, 내 자식들이 태어나 성장한 곳입니다. 강과 안개, 인상 깊은 소양로의 어느 골목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요. 춘천이 내 작품 속에 들어온다는 것은 인상 깊었던 부분 부분들이 작품 속에 끼어드는 것이지 명확하게 ‘어디’라고 특징지을 수는 없어요. 상상력이란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만이 또 전부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작가의 작품들은 가족 간의 왜곡된 관계나 비정상적인 성장, 중산층 중년여성의 심리적 갈등 등 여성적인 소재를 많이 다루고 있다. 그동안 춘천이라는 중소도시에서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러한 환경 속에서 더러는 자신의 체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이러한 작품들이 탄생하게 된 작가의 이면에는 어떤 것이 있었던 것일까.

가족관계는 실존적인 것입니다. 가정의 규율과 질서, 관습 속에서 개인의 욕망은 자유로워지고 싶은 본능적인 것이지요. 가족 속에서는 언제나 견고한 벽이 있어 창작이 요구하는 공간, 나로서 살고자 하는 공간과 항상 부딪히지요.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과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의 줄다리기, 길항한다고 하죠. 어떤 것의 가치도 소홀한 것은 없지만 그 속에서 갈등하는 존재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 하듯, 남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 쓸 줄 알아야 하지요. ‘누구나 자기 안에 추억과 비밀과 죽음이 간직된 자기만의 방이 있다’고 하죠. 사람은 여러 겹이지요. 글쓰기는 내가 지켜야 하는 어떤 중요한 나만의 영역, ‘속씨’라고도 할 수 있어요.

작가의 남편은 박용수 전 강원대 총장이다. 학회와 관련된 발간작업을 도우면서 조우한 적은 있지만,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의 남편으로서는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만나 가족을 이루었고,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은 작가의 작품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보통의 남녀가 그렇듯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만남이었어요. 한 직장에서 근무했던 인연이 오히려 직장을 떠난 후에 이어져 결혼에 이르게 되었어요. 젊었을 때는 문학청년으로 책도 많이 읽었고, 지금도 학자로서 책을 읽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하지만 결혼하기 전에 내 작품을 읽지 말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어요. 글쎄, 한 편도 읽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읽었다는 말도 없었어요. 작가로서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작가이긴 하지만 가족에게 제 작품은 여전히 쑥스러운 존재입니다.

새로 발간된 《오정희 컬렉션》은 5권의 소설책과 한 권의 대담집을 포함해 모두 6권을 한 질로 묶은 전집이다. 32절의 작은 판형이라 읽기 편하고, 파스텔톤의 안정적인 색감으로 만들어진 하드커버의 장정은 소장하고 바라보기에 지루하지 않은 감각적인 구성이었다. 연륜을 가지고 출판시장을 선도하는 중견 출판사들의 이러한 시도는 훌륭하지만 젊은 세대들에게 그 가치를 알리기 어려웠던 작가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그간의 작품들을 다시 엮으면서 작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제가 살아온 자취를 끌어안고 사는 성격이 아니라서 작품도 ‘없어질 것은 없어지고 남아있는 것은 남아 있다가 또 다시 그의 운명대로 사라지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에 작품을 묶어서 망실되지 않게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제안을 받고 나서 처음엔 내키지 않았지만 작업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고민도 많이 했고 자문도 많이 구했어요. 20대나 30대에 쓴 글이 70대에 보면 당연히 만족스럽지 못하고, 고치다 보면 한이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하지만 어느 날 그냥 그 자리에 놔두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0살의 나, 30살의 나로 그때그때의 절실함이 그런대로 ‘힘을 갖고 있구나’, 그리고 고심했던 과정 같은 것이 생각나서 ‘노력을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치열하게 써왔다면 ‘지금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했고요. 하나의 매듭이 지어진 것 같아서 앞으로 더 나아갈 의지가 생기기도 했지요.

작품집이 한꺼번에 묶여 나온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었으리라. 이번 《오정희 컬렉션》의 발간을 기점으로 문학작품을 쓰며 돌아본 작가의 삶은 어떠할까?

문학을 통해 삶을 살았으니까 삶의 태도랄까 지향은 항상 문학에 가 있었어요. 사람들의 삶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상처도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치유하는 것도 문학을 통해서였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문청(文靑)으로서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자기 신비감에 싸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나도 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는 긴 여정이었죠. 글도 지극히 사적인 것에서 출발합니다. 자기미화나 신비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자기 신비감을 벗겨내야 타인의 신비감이 보인다고 합니다. 자신의 내면의 아픔을 깊이 응시하고 드러냈을 때 진정성을 인정받고 독자와 소통하게 되지요.

춘천에서 자리하면서 작품활동을 계속 하게 될지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했다.

문학이라는 것이 한 번 사로잡히면 끝까지 매료되게 됩니다.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은 춘천에 머물면서 작품활동을 하겠지요. 세상도 변하고 나도 변했지만, 작가로서 앞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아직도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고, 쓰고 싶은 글도 많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니 작가는 작가의 집에서 가까운 정족리 근처 산채정식 집으로 안내한다. 내내 옆집 어른과도 같은 편안함으로 자리를 이끌어주었지만, 큰 작가와의 인터뷰에 긴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점심을 먹는 자리에선 더 소탈한 인생 선배님 같은 모습으로 아이들 이야기며 일 이야기를 묻고 들어주었다. 일상의 이야기조차 작가가 택하는 문장 하나하나에서 정리가 되고 빛을 발하는 것을 보면서 “오정희의 문장은 수많은 예비작가가 필사하는 교과서로 통한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옛 문사들이 춘천에 대해 언급한 한 줄의 시문조차도 반가운 게 춘천사람들의 마음이다. 하물며 춘천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는 큰 작가를 춘천에 품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앞으로도 작가의 작품 속에 잔잔히 춘천의 향기가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작가나 평론가가 아닌 춘천의 한 시민기자의 시각으로 인터뷰를 하면서 행여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까지 다독이면서 ‘편하게 쓰라’고 격려하는 작가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여운으로 남는다.

 

원미경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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