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원 사이에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관계인 ‘라포’가 형성이 되고 모두가 세션 분위기에 적응할 무렵 슬그머니 즉흥연주에 대해 소개를 한다. 실제로 연주기술은 전혀 필요 없음을 강조하면서 연주라는 생각보다 버튼을 눌러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잠시 여행을 하는 기분이면 충분하다고 설명한 후 누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핀다.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사람, 자신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는 사람, 미간을 찌푸리며 부끄러운 웃음만 보이는 사람 등 이미 자기에 대해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클라이언트를 본다.

그 중 아무런 말없이 생각에 잠긴 듯 보였던 A씨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까짓 것 한 번 해보자’하는 것이다. 그의 연주가 조금 더 음악이 되도록 돕기 위해 나도 피아노에 나란히 앉는다. 내가 옆에 앉아마자 그는 주저 없이 연주를 시작했고, 강한 터치, 거침없는 펼침, 다양한 다이내믹으로 모두를 숨죽이게 하더니 연주가 끝나자 마치 큰 무대를 마친 진짜 연주자처럼 멋들어지게 인사를 보낸다. 사람들도 환호와 박수로 화답했고 A씨는 아주 만족한 듯 시원하게 웃었다.

이어서 연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음악을 전공한 B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연주에 답답함이 담겨있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혼란스러움도 있고….” 그 대답이 못마땅한지 연주를 한 A씨는 크게 부정하며 “난 전혀 답답한 기분이 아닌데? 연주를 하면서 느낀 것은 해소감이야!” 이런 대답에 몇 마디가 더 오고가더니 얘기는 어색하게 마무리되었다. B씨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의 연주에도 열심히 설명을 덧붙였지만, 정작 자신은 즉흥연주를 시도하지 않은 채 세션이 끝났다.

이런 모습은 어디에나 있고 사실 누구에게나 있다. 상대방을 위한다거나 조직을 위한다는 이유를 담아 조언과 충고하기를 ‘느낌’으로 끌고 가는 것. ‘답답하다’, ‘혼란스럽다’라는 단어에는 관찰이 아닌 느낌이 담겨 있는데, 이렇게 느낌을 표현할 때에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관찰’이라는 요소로써 근거를 설명할 수 없다면 그 느낌은 상대방의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것임을 알아야 한다. 가령 연주는 강렬했지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거나 연주자의 떨림을 보았다는 이유로 답답한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했다고 표현했다면 B씨의 설명엔 힘이 실렸을 것이고, 상대방에게도 도움이 되는 정보가 되었을 것이다.

많은 경우, ‘관찰’이 근거가 되기보다 오히려 ‘느낌’을 근거로 놓고 상대방을 판단하고 평가하면서 관계에 상처가 난다. “너는 너무 물러서 쉽게 당하잖아”라는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관찰인가? 느낌인가? 너무 무르다는 관찰 결과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당하고 만다는 결론으로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 이 표현에서 불편함이 오는 이유는 근거라는 알맹이도 없이 단정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관찰연습을 하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관찰’과 ‘느낌’을 구분하지 못하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상대방에게 진짜 도움이 되고 싶다면 보고들은 내용을 정리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많다. “오늘도 다른 사람 부탁 들어주느라 일이 밀렸다는 얘기를 하는 거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래서 기분이 어떤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질문하면 된다. 그리고 무르게 느껴지는 것은 기본적으로 내 감정이라는 걸 기억하자. 같은 상황에서도 열 명이면 열 명이 모두 다른 느낌을 갖기 때문이다. 살아가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많은 대화들을 시도하지만 그저 자기감정을 타인에게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는 인식조차 못한 채….

타인을 보고 어떤 느낌이 올라올 때 느낌의 출처를 찾아라. 관찰로 설명할 수 있는 타당한 느낌이 아니라면 감정의 화살은 가만히 내가 품으면 된다. 관찰로 이루어진 근거를 만들며 자신의 느낌에 끊임없이 질문하는 훈련은 직관을 발달시키고 훈련된 직관은 나를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안내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모른다는 사실 뿐”이라고. 나는 너를 모른다. <끝>
 

이진화 (음악심리문화연구소 ‘나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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