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사회적경제네트워크 조경자 새 상임대표

10년쯤 뒤 한적한 마을 공동체 안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꿈꾸고 있는 조경자 상임대표. 김예진 시민기자

아무런 불화나 다툼이 없는 공동체. 죄도 없고 벌도 없는 공동체. 어떤 사람이든 일해야 한다는 강박 없이 자기본성대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 이런 공동체가 지구상에 있을까? 그야말로 공상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그런데 상상 속 이야기가 아니다.

올해 춘천사회적경제네트워크 상임대표를 맡은 조경자(51) 씨는 지난 연말 4박5일간 일본의 ‘애즈원(As one) 커뮤니티’를 방문했다. 일본 나고야 중부국제공항(中部国際空港)에서 배편으로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소도시 스즈카(鈴鹿)에 있는 공동체다. 비틀즈의 ‘이매진(Imagine)’ 노랫말 가운데 “세계는 하나가 될 거예요(The world will live as one)”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약 200명 정도가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어떤 규약이나 의무도 없다고 한다.

애즈원 커뮤니티는 그녀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도 남았다. 그곳에 다녀온 후 그녀에게는 또 다른 꿈이 생겼다. 지금은 그녀 앞에 펼쳐져 있는 많은 일들 때문에 당장 어찌 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10년 정도 후면 아마도 그 꿈이 구체적인 설계도로 준비돼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녀의 삶 속으로 잠시 들어가 보자.


고향이 평택이라고 들었다.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에서 4녀 1남 중 셋째 딸로 태어났어요. 부모님이 중국음식점을 하셔서 생활은 그만저만 했어요. 어린 시절 마을에서 꽤 총명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역사가 좋아 대제국 발해의 영광을 꿈꾸며 역사 선생님이 되고 싶었죠. 지금 돌아보니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셈이네요.

198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대신 일찍부터 사회활동가의 길을 걸었다. 당시 성공회 객사리교회에서 평생 가장 존경하는 사람인 이재복 전도사를 만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교회활동을 하며 컴퓨터를 배워 컴퓨터학원 강사를 하다 1989년에 이 전도사의 소개로 상계동 나눔의집에서 일하게 됐다. 당시 청년들은 나눔의집을 통해 도시빈민운동의 일환으로 탁아소나 공부방 등을 운영했다.

탁아활동가로 나눔의집 활동을 하면서 그 당시 야학에 다녔던 많은 여성노동자들을 만났어요. 당시 상계동 지역에는 봉제공장 등 영세한 공장들이 많았죠.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열두 시간 맞교대를 하는 등 노동조건이 무척 열악했어요. 그들이 꾸었던 노동과 자본이 분리되지 않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어 움직이는 생산공동체의 꿈을 지켜볼 수 있던 시간들이기도 했습니다. 만 2년의 시간을 상계동에서 활동하다 1991년에 평택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평택으로 돌아오니 용산에 있는 미군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격렬한 싸움 끝에 시민들이 이겼다. 미군기지 이전이 백지화된 것이다. 그 성과로 ‘한사랑청년회’라는 청년단체가 만들어졌다. 당시 객사리교회(현 팽성교회)에서 ‘한벗공부방’을 만들어 활동하던 그녀는 청년회 상근 부회장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청년회 활동을 3년 정도 했을 때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 뒤늦게 대학진학을 결심한 것이다.

지난 연말 방문했던 일본 스즈카의 애즈원 커뮤니티센터

1994년 초였던 것 같아요. 새로운 모색이 필요했어요. 현장에 매몰되면서 답답함을 느꼈던 것 같아요. 고민 끝에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대학은 늘 숙제와 같은 거였죠. 주변에서는 대학을 뭣 하러 가느냐고 했지만 가도 후회, 안 가도 후회할 거면 가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내 안의 숙제를 종결짓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거죠. 게다가 시골에서 공부 좀 한다는 소릴 들었던 딸에 대해 늘 아쉬워했던 엄마와 가족들의 지지를 외면할 수가 없었죠.

결국 1995년 뒤늦은 나이에 평택대학교 사회복지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평택YMCA 시민중계실 간사로서 소비자 상담을 했던 것이 사회복지를 선택한 계기가 됐다. 1997년 3학년 때 성북 나눔의집으로 실습을 나가 후일 남편이 되는 박순진 신부를 처음 만났다. 3년 뒤인 2000년에 결혼을 한 후 육아휴직까지 이어져 2003년에야 다시 현장에 복귀했다. 2004년,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환경재단 시민사회활동가 장학프로그램에 선정된 것이다. 중앙대 대학원에서 청소년 빈곤정책에 대해 연구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변곡점을 맞는다. 오랜 서울생활을 마감하고 춘천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된 것이다.

2008년 8월 남편이 춘천으로 발령이 나면서 춘천으로 이사를 왔어요. 사실 처음에는 춘천행이 내키지 않았죠. 느닷없이 그동안의 활동기반과 관계들을 떠나야 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어요. 당시 초등 2학년이었던 아이도 맘에 걸렸고요. 오면서 이왕 옮기는 거 한 10년은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올해로 벌써 10년이 됐네요. 이제는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이 없어요. 춘천에 펼쳐놓은 관계가 너무 많거든요.

춘천으로 옮긴 후 춘천나눔의집 사무국장을 맡기도 하고, 시민사회네트워크 간사도 맡다가 2010년에 나눔의집 일을 정리했다. 2011년에 강원도광역자활센터 교육팀장으로 취업했다. 이후 2013년 10월까지는 인생에서 가장 많은 월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안정된 직장이라 좀 더 오래 일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또 새로운 일을 벌이며 박차고 나왔다. 그녀의 스타일이 그랬다.

조직이라는 틀보다는 자유롭게 일하는 스타일이죠. 마침 2013년부터 지역을 기반으로 한 교육의 기회가 많아지기 시작했어요. 강원도가 협동조합 아카데미를 지원하는 등 네트워크 교육의 경험을 쌓을 기회가 늘어났죠. 교육을 위해 기획단이 만들어지고 마을기업 설립 전 교육을 위해 강사단이 구성되기도 했어요. 각자 활동하던 사람들이 하나의 틀 안에 모이게 됐죠. 새로운 경험과 재미를 느꼈어요.

강사네트워크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고 더 진화된 형태로 협동조합에 대한 논의로 발전하게 됐죠. 그 노력이 2014년 2월 협동조합 ‘교육과나눔’창립으로 결실을 맺었어요. 처음에 18명으로 출발해 현재 23명의 조합원이 활동 중입니다. 올해는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할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협동조합 ‘교육과나눔’ 활동도 어느새 4년이 지났다. 어떤 성과가 있었을까?

사회적경제 활동의 만남 속에서 변화를 꿈꾸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행복했어요. 만나는 사람들마다 변화의 욕구나 열망이 있음을 확인합니다. 작은 시도 그 자체가 변화에 대한 열망이자 꿈입니다. 2013년 마을기업설립교육에 아무런 계획도 없이 왔던 홍천의 한 시골마을 여성농민들이 홍천명품한과라는 마을기업을 만들었는데, 지난해 우수 마을기업으로 선정돼 마을기업 교육의 강사로 사례발표를 하더군요. 만두와 메밀전병을 만드는 영월 먹거리협동조합의 조합원들은 모두 70대의 할머니들입니다. 작은 시도로 변화를 이끌어낸 사례들입니다. 지난해에는 청소년사회적경제교육센터를 부설로 설치해 학교협동조합도 지원하고 청소년 체인지메이커 활동도 진행했습니다.

 

 

 

그녀는 올해 춘천사회적경제네트워크 상임대표로 선출됐다. 50여개 사회적경제 기업들이 소속돼 있는 단체다. 어느덧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춘천에 온 지도 10년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변화에 대한 열망은 잠복해 있는데 물꼬를 트기가 참 어렵다. 그 어떤 일에도 왕도(王道)는 없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조직운영에 대한 관심은 없어요. 핵심은 사람들이 무언가 해볼 수 있는 판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지역에서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놀 수 있는 디딤돌 같은 역할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플랫폼 같은 역할이지요. 춘천에는 현재 200여개의 사회적경제 조직이 있는데, 외부에서는 춘천이 참 젊고 역동적이라고 해요. 지역 내 관계 속에서 미션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 기업들이 네트워크 안에서 함께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어요. 사업은 망해도 사람은 남아야 합니다. 개별적 성과나 생존도 중요하지만 지역적 차원의 경험과 자원의 축적으로 이어져야 지속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죠.

춘천은 산업기반이 취약하다. 공무원을 제외하고는 안정적인 일자리가 별로 없다. 자영업은 이미 과잉이다. 그래서 관광사업에 목을 맨다. 과연 춘천에서 사회적경제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개발이나 외부자원에 의존하는 지역발전은 이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봅니다. 지역주민 스스로 다양한 자원을 네트워킹해 해결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문제와 우리의 필요를 우리가 주체가 돼서 다양한 사회적 자본을 연결해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사회적경제가 지역사회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녀로 인해 올해 춘천사회적경제 지형이 어떻게 변할지 사뭇 궁금해진다. 크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변화를 이끌어가는 것이 그녀의 장점이라면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일까? 조경자 상임대표의 50년 인생에는 세 번의 변곡점이 있었다.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현장활동을 한 것, 남편 박순진 신부를 만난 것, 그리고 춘천으로 기반을 옮긴 것이 그것이다.

이제 그녀에게는 또 한 번의 변곡점이 남아있으리라. 자신의 10년 후 모습을 그녀는 이렇게 상상해본다. 해가 잘 드는 작은 집 앞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고 있다. 어느 한적한 마을에서 좋은 사람들끼리 어울려 집을 짓고 아이들을 함께 키우고 경제활동도 함께 하면서 그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답게 자기 본성에 맞게 살아가고 싶다. 그것이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굳게 믿기에.

전흥우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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