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춘천으로 이사 온 지 20년이 다 되어간다. 들꽃을 찾아 이름 모를 숲길을 걷거나 어느 산자락에서는 텃밭도 가꾸며 시내에서 가까운 강변의 풍광을 바라보는 것이 휴식과 위로가 되곤 했다. 이제는 바라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골짜기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과 강을 따라 마을과 마을을 오가던 사람들의 발길이 오랜 시간 만들어냈던 그 길 위에 멈추어 본다. 멈춰야 보인다.

첫 번째 ‘춘천마실’은 남면 발산리다. 3월이라지만 아랫녘 꽃 소식 분주할 때도 눈이 내리는 일이 흔한 춘천이라 반가운 ‘비꽃’이 떨어지던 3월 중순, 소남이섬으로 향했다. 하늘을 끌어와 묵직하게 덮어 주는 것 같은 안개비가 풍경을 더욱 고요하고 애잔하게 했다.

춘천 시내에서 소남이섬펜션을 검색하고 가면 새로 난 강촌대교를 건너 소주터널을 지난다. 403번 국도 발산2리 마을회관 앞 삼거리에서 우회전. 여기서부터 실개천을 왼쪽으로 두고 가는 풍경도 평화롭기 그지없다. 남면사무소를 지나면 충의대교가 보이는데, 이 대교를 건너면 홍천 마곡이다. 대교를 건너기 직전에 좌회전 하면 작은 황골교라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 소남이섬 캠핑장이라는 작은 이정표가 있지만 놓치기 쉽다. 황골교를 지나 인적이 없는 산길로 접어든다.

산길이 계속 될 것 같아 얼마를 더 가야하나 고민하는 순간, 고갯마루에서 탄성이 나온다. 홍천강이 소남이섬을 두르고 오른편은 춘천, 왼편은 홍천 마곡유원지와 배바위 트레킹길이 한 눈에 펼쳐진다. 반드시 차를 세우게 되는 곳이다. 안개비가 고마웠다. 골골에는 운무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잔잔한 강물 위로는 물안개도 살포시 번지고 있었다.

고갯길은 짧다. 몇 백m쯤 내려가니 오른쪽에 소남이섬펜션이 있다. 펜션을 지나면서부터는 비포장길인데, 소남이섬은 쇠파이프로 만든 긴 가로막으로 길을 막아 개인 소유지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때마침 입구는 열려있었고, 멀리 보였던 멋진 풍경을 포기하고 돌아설 수는 없었다.

조심스레 자갈과 흙을 메워 임시로 만든 길을 지나 섬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섬 안의 농경지에는 검고 윤기 나는 거름흙이 잔뜩 뿌려져 있었다. 그곳에서 토지를 임대해 마농사를 짓는 전준갑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섬은 서울사람과 어느 회사의 소유라고 했다. 그는 그의 아내와 주로 마를 경작한다. 거두리에 살지만 농사철에는 이곳에서 거주하기도 한다.

“아주 오래 전엔 이 섬 가운데 밤나무밭이 있었어요. 몇 아름이나 될까? 아주 큰 밤나무도 있었어요. 한 번은 큰 수해가 나서 섬이 다 잠겨 집도 떠내려가고 했을 때, 그 밤나무에 올라가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있었대요. 그렇게 큰 나무를 다 베어버리다니…. 지금은 마을도 밤나무도 다 사라지고 없어요.”

허락을 받고 소남이섬을 둘러보았다. 섬 가운데로 메이플 시럽의 원료가 되는 빨간색이 환상적인 슈가메이플이 줄지어 심겨져 있었다. 몇 해 전 1박2일 쵤영팀이 다녀간 후, 입소문을 듣고 이곳을 찾은 캠핑족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로 몸살을 앓다 못해 입구를 막았다. 단풍나무와 캠핑장 가운데를 지나니 넓게 펼쳐진 자갈밭 위로 갈대들이 무성하고 멀리 배바위가 보였다. 배바위를 가까이 보려고 갈대밭을 지나는데, 어린 고라니가 놀라 폴짝폴짝 빠르게 달아난다. 오랫동안 안심하고 지냈을 텐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배바위 근처에는 어부의 모습도 보였다. 궁금해서 소리쳐 물었다.

 

“안녕하세요? 지금 뭘 잡으시는 거예요? “다슬기 잡아요.”

오래된 부부는 이 홍천강에서 작은 배를 타고 다슬기를 잡아 식당도 운영한단다.

소남이섬을 나오며 입구에 있던 펜션에 들렀다. 마당에는 보트가 있었다. 충청도에서 이곳의 풍경이 좋아 고향을 떠나온 지 18년쯤 되었다고 한다. 부부는 낯을 좀 가리는 듯 보였으나, 신문도 건네고 펜션 운영에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묻자 금세 친근하게 설명해준다. 숙박과 수상레저도 즐길 수 있는데, 두어 시간 전에만 예약하면 식사만도 할 수 있단다. 이곳에서 아이들도 학교를 다녔고 이제는 부부만 남았다. 이곳의 사람들은 홍천강에서 아이들을 품고 길러냈다. 아름다운 풍경의 소유는 외지인들이고, 이곳도 언젠가는 펜션타운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생겼다.

소남이섬 건너는 홍천 마곡이다. 소남이섬을 오던 길로 되돌아 나와 충의대교를 건너자마자 왼쪽 마을로 들어서면 마곡이다. 카누체험장이란 입간판과 배바위 트레킹길 안내도가 있다. 안내표지판 왼쪽으로 강을 따라 작은 오솔길이 보인다. 배바위 트레킹길이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너브내 수변탐방길과도 이어져 모곡 밤벌강변에 이른다.

전망대에 오르면 배바위와 그 뒤로 소남이섬이 펼쳐지고 아래로는 오지소(吾止沼)가 짙푸르다. 의암 유인석이 ‘니산구곡’이라 명명하고 노래를 남겼다는데, 이 오지소가 구곡에 해당한다. 니산구곡가의 구곡 ‘오지소’를 옮겨본다.

소명오지지오행 沼名吾止止吾行
인여경의안성영 人與境宜安性靈
좌야봉창명월도 坐夜逢窓明月到
산객개정수무성 山客皆靜水無聲
이름이 오지라 내 걸음도 멎고
사람들과 더불어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즐기네.
밤중에 앉으니 창문에 밝은 달 비쳐들고
고요한 산속에 물소리는 잠잠하네.


빗소리도 들리지 않는 사방이 적막한 날. 수면에 그 흔적도 남기지 않던 안개비 오는 날. 그래서 이 시가 온전히 들어온다.

왔던 길을 되돌아 춘천시내로 향했다. 403번 도로를 타고 남면사무소 조금 못 미처 주요소 길로 들어서면 윤희순 의병유적지가 있다. 최초의 여성의병으로 알려진 그녀는 16세에 의병장 유홍석의 며느리가 된다. 시아버지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여성의병활동에 적극 앞장섰다. 군자금을 만들고 무기를 제조하기도 했다. 일가족이 중국으로 망명해서 가족들의 독립의지를 북돋고, 자금을 모으고 학교를 설립해 항일정신을 가르치는 등 구국운동에 전념했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도 두 아들과 함께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유적지에는 정화수를 떠놓고 의병의 승전을 기원했다는 우물터와 유적비, 노래비 ‘안사람 의병가’ 등이 있다.

남면사무소 건너에는 옛 발산중학교가 있다. 폐교가 된 학교는 현재 반딧불이야기캠핑장이란 이름으로 수련회, 워크샵, MT, 기업연수, 체육대회 등 단체캠핑을 주로 하고 있다. 은행나무가 운동장 둘레를 빙 두르고 있어 주변의 들녘과 함께 노란 가을이 그려진다.

학교 뒤쪽으로는 좌방산에 오르는 등산로의 들머리다. 이정표도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좌방산은 해발 502m로 서너 시간이면 충분하다. 홍천강을 조망할 수 있으며 한치령이나 삼일폭포로도 이어지는 등산로다.

춘천시 남면 발산중학교 1학년 1반 류창수
고슴도치같이 머리카락 하늘로 치솟은 아이
뻐드렁 이빨, 그래서 더욱 천진하게만 보이는 아이,
점심시간이면 늘 아이는 혼자가 된다
혼자 먹는 도시락, 내가 살짝 도둑질 하듯 그의 도시락을
훔쳐볼 때면 아이는 씩-웃는다 웃음 묻어나는 쓸쓸함,
어머니 없는 그 아이는 자기가 만든 반찬과 밥이 부끄러워
도시락 속으로 숨고 싶은 것이다 도시락 속에서 울고 싶은 것이다.
어른들은 왜 싸우고 헤어지고 또 만나는 것인지?
깍두기조각 같은 슬픔이 그의 도시락 속에서
빼꼼히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 이영춘, 〈슬픈 도시락1〉

학교 오른편으로 작은 시내가 졸졸 흐른다. 어쩌면 1학년 1반 류창수는 하교 후 이곳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시인은 IMF 즈음 발산중학교에서 근무했다. 시인의 시선이 참 따뜻하다.
발산리의 이른 봄을 다녀왔다. 여름과 가을을 어찌 지낼까? 눈 덮인 발산리도 궁금하다.

김예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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