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면 방하리

춘천의 4월은 집안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초목이 무성해지기 전, 4월의 물빛과 산빛은 시시각각 그 색이 달라진다. 4월 초 물오른 끝가지들의 붉은 빛도 며칠 지나면 연둣빛 잎사귀를 내보이고, 강물 위의 윤슬도 한결 부드러워진다.

경춘국도 46번을 따라 서울방향으로 가다가 경강교를 건너기 전 방하리길로 접어들면 이렇게 예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시선 저 멀리 겹겹이 보이는 먼 산의 능선 아래로 여유롭게 흐르는 북한강과 잘 가꾸어진 자라섬. 보는 이의 마음은 낭만으로 충만해진다.

강변길이 아름다워 드라이브를 즐겨도 좋지만, 차를 타고 휙 한 번 보고 마는 풍경은 금세 끝이 나버려 가능한 한 아주 천천히 지나고 싶은 길이다. 다행히 방하로는 차량통행이 드물어 한산하다. 자라섬이 보이는 방하로 초입구간을 제외하면 아름다운 강변은 펜션, 수상레저 등의 위락시설이 즐비하다. 강을 따라 아스팔트길로 계속 직진하면 술어니고개에 이른다. 고개를 넘어가는 가을은 호젓하기가 그지없다. 차분히 내리는 비처럼 갈잎을 후루룩 후루룩 떨어뜨리는 낙엽송들과 노란 은사시나무들의 펄럭임, 강물에 비치는 가을 숲은 시라도 한 구절 나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래서일까? 유승우 시인은 고향인 방하리를 떠올리며 이렇게 읊었다.

강 언덕 강원도의 봄동산 춘성군
남쪽 남면 꽃마을 芳荷里
내가 돌아가야 할 첫 모습이다.
이제 늙어가면서 밤마다
북한강의 젖은 목소리를 듣고,
한밤 내 그리움에 젖은
내 꿈은 새벽마다
뽀얗게 흐느끼는 안개로 깨어나
유년의 강 언덕을 떠돌며
목숨의 붉은 꽃잎을
적시며 운다.

시인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농부는 한걸음에 달려왔다. 방하로 강변길의 좌측으로는 새덕산 자락인데 큰 골은 양지바르고 버덩이 넓은 편이다. 좌측 큰골길로 접어들어 밭일을 하고 있던 유재선(65) 씨를 만났다. 그는 나이 열여섯에 서울로 친구 따라 돈 벌러 갔었다. 이것저것 허드렛일을 하다가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안전사고가 있었다.

“아, 그 길로 그냥 내뺐지. 아주 정나미가 떨어져서….”

열아홉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이도 어리고 하니 뭐 제대로 돈벌이도 안 되고, 남이섬 선착장에서 내려 방하리까지 걸어오는데, 산길을 걷고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오는데, 그렇게도 맘이 푸근하고 좋아. 여기 큰골은 강변보다는 따뜻해요. 야트막한 이 앞산이 강바람을 막아주거든. 고향이란 그런가봐. 그래, 그때부터 지금꺼정 쭉 여기서 살았어요.”

그는 방하리 2반 노인회관을 지을 무렵 이장도 지냈다. 논농사와 밭농사도 짓고, 돈이 되는 특용작물로 느타리버섯을 13년이나 경작해서 아이들을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냈다. 몇 년 전부터는 근교에 제이드가든이 생겨 그곳에서 농장관리를 하고 있다.

“그래도 월급이 나오니 농사는 우리 먹을 거나 좀 지어요.”

새로 지은 집 뒤로 오래 전에 살았던 구옥 두 채가 어린 시절 흑백사진처럼 남아 그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었다. 농부의 집 주변에 있는 잘 다듬어진 소나무와 꽃 조경수들을 보면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외지인인가 싶기도 하고, 밭과 구옥을 보면 토박이 농부 같기도 하고 못내 궁금했는데 의문이 풀렸다.

“아이고, 이런! 마눌님 오시면 야단치겠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다가 해야 할 일이 생각났나 보다. 말은 그리 하면서도 집안 어디선가 작은 화분을 들고 나오더니 활짝 핀 수선화 한 삽을 푹 떠서 담아 주는 거다. 수선화와 튤립 몇 폭을 받아들고 제이드가든에 놀러 가면 커피를 사겠노라 약속했다.

방하리는 가평과 경계를 두고 있다. 남이섬의 주소는 방하리지만, 선착장이 가평에 있어 가평 땅이라 여기는 사람이 많다. 본디 남이섬은 방하리와 한 몸이었다. 홍수가 나서 물길이 갈라지면 섬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걸어서 다녔다. 청평댐이 생기면서 남이섬은 완전히 섬으로 굳어져 방하리 사람들은 배를 타고 가평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도로가 생기면서 강촌이나 춘천을 나오기도 하지만 생활권은 가평이다. 춘천시에서는 방하리로 가는 시내버스가 없다. 가평에서 운행하는 진흥고속 33-9번 버스가 최근 하루 4회에서 5회로 늘려 운행된다. 서천리, 경강역, 문의골마을, 소라리조트, 방하리 큰골, 리버캐슬을 거쳐 가평터미널로 간다.

방하리 마을회관을 지나 큰골길 방향으로 방성분교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포장길이 끝나면서 새덕산 자락 임도가 시작된다. 춘천시 생활체육협회에서 세운 MTB코스라는 표지판이 있는데, 왼쪽은 강촌 굴봉산역 쪽이고 오른쪽은 가정리로 이어지는 임도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임도로서 코스가 여러 갈래다. 강촌, 한치령, 관천리, 가정리로 통한다.

문의골길에는 작은 시내가 흐르고 ‘나무사이에’라는 목공방이 보였다. 정성필(45) 씨는 송파에서 방하리로 온 지 4년 되었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이라 서울에서 가까운 마석에 살림집이 있고, 이곳 방하리는 사업장이다. 손수 지은 작은 오두막 분위기의 객실이 4개동. 펜션과 가구를 주문 받아 제작하고 있다. 자연이 좋아 가까운 곳을 찾다가 새벽의 물안개와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강변길에 푹 빠졌다고 한다. 마석에서는 중·고등학교가 마땅치 않다며 춘천의 학교들을 궁금해 했다. 작은 학교들은 점점 사라지고, 그래서 더욱 성장기 자녀를 둔 부모는 시골살이가 어렵다. 시골은 이미 노년기다. 춘천의 산골마을 어디나 비슷한 사정이다. 이곳 방하리도 풍관 좋은 곳에 사업장만 가지고 있거나, 주말에만 다녀가는 외지인과 겨우 텃밭을 일구며 사는 노인들만 남았다.

지금은 폐교가 된 방성분교를 졸업한 할아버지를 만났다. 마을길 옆 비탈진 곳에서 밭을 갈고 있었다. 옛집과 농기구들이 아주 말끔하게 정돈돼 있었고, 큰 돌덩이 두 개와 재만 수북한 뒷간이 인상적이었다.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데 용변 후 옆에 쌓아둔 재를 섞어 처리한다

“전쟁 끝나고는 그래도 애들이 많았어요. 나 다닐 땐 방성국민학교였는데, 분교가 되었다가 폐교된 지 한 20년쯤 될 거에요. 그리곤 우리 애들도 다 가평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지.”

언덕 아래 옛집의 모습을 잘 간직한 정겨운 집이 있어 여쭈었다.

“저 집은 나랑 막걸리 친구…. 얼마 전 마나님이 돌아갔어요.”

주말이라 마을길로 젊은이들의 4륜 오토바이가 심심찮게 지나며 흙먼지를 날렸다. 굴봉산역 앞에서 빌려 타고 임도를 넘어오는 거라고 했다. 엔진소리를 붕붕대며 산길을 달리는 오토바이의 꽁무니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저런 식으로 임도를 활용하는 것은 정말 끔찍하다 싶었다. 얼마나 많은 숲의 생명들이 저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을까 싶었던 것이다. 나무들와 풀꽃들이 소스라치는 모습, 두려움에 가던 길을 멈추는 동물들과 알을 품지 못하는 새들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이런 까닭에 굴봉산역으로 4륜 오토바이가 다니는 임도는 사람의 발길도 주저하게 만든다. 술어니고개를 넘어가는 길엔 오토캠핑장들의 텐트와 불빛들이 화려했다. 숲까지 와서 조금의 불편함도 감수하지 않겠다는 마음들이 엿보이는 것 같아서 내심 못마땅했다. 음악소리와 불빛이 없다면 더 많은 것들을 가슴에 담아 갈 텐데 말이다. 그들은 물소리와 짐승소리, 별빛이 속삭이는 소리와 새순 자라는 소리를 들었을까? 캠핑장을 지나 고갯마루에 들어서면서 나뭇잎 우거진 여름 숲이 슬그머니 걱정되었다. 곧 있을 비 소식에 회색빛 하늘이 어쩐지 쓸쓸했다.

김예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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