깻길 산속에서 만난 목공방 ‘하루’의 홍천 씨

홍천(51) 씨를 만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4륜 바이크를 타고 강변을 질주하는 젊은이들과 연인들로 활기 찬 강촌에서 말골로 가는 모퉁이 하나만 돌아가면 공기가 사뭇 달라진다. 강변 버드나무 순들이 움트고, 인적이 드문 숲길 입구에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100미터쯤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말골, 오른쪽은 깻길마을이란 이정표가 있다. 말골을 지나 깻길로 향했다. 생강나무꽃 향이 온 산에 진동할 무렵이었다. 춘천마실 취재차 지나던 이 길은 어느 마을과 맞닿아 있을까? 길 따라 가다보니 팔미농원 쪽으로 통한다. 궁금증이 풀릴 무렵, 저절로 들어선 마당이 ‘하루’였다.

강촌에서 고개를 넘어 팔미농원을 지나기 전에 소박한 목조건물과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문을 두드렸다.. 목조건물의 주인은 낯선 이의 방문에도 선뜻 집안으로 맞이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실내에 가득한 가구들과 직접 만든 소품들을 구경하느라 연신 감탄사를 토해내며 부산하게 질문을 해댔다. 이름이 홍천이라며 가볍게 웃는다. 처음에는 고향을 말하는 줄 알았다. 홍천 씨의 고향은 주문진이고, 강릉고등학교를 나왔다. 그런 그가 언제 어떻게 이곳에 정착했을까?

“처음부터 상업적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은 아닙니다. 2011년에 이 땅을 우연히 보게 되었지요. 그 몇 년 전에도 시골살이를 꿈꾸며 홍천에 땅을 샀는데, 그만 낭패를 본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맘에 드는 터전을 구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 싶었죠. 그 후 아내와 딸아이와 함께 이 땅을 보게 됐는데, 가족들도 모두 좋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바로 결정했죠.”

아내와 딸은 아직 서울에서 살고 주말에만 만난다고 한다. 주로 서울에 있는 가족이 이곳으로 온다. 그와 그의 아내는 중앙대학교 화학과 86학번으로 캠퍼스 커플이었다. 학교 졸업 후에 전공을 살려 KCC에 입사했고, 나일론을 생산하는 한국 카프로락탐에서도 근무했다. 이곳에 오기 몇 년 전에는 ICT폴리텍 정보통신기능대학에서 총무팀장을 맡아서 일했다.

“그 일은 제 적성에 전혀 맞지 않았어요. 저는 이과생이라 무언가 결과적인 생산물이 있어야 일하는 맛이 있는데, 기안과 결재 등 문서를 다루는 일에는 만족하질 못했어요. 나이가 마흔다섯이 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자고 다짐했죠.”

45세 가장이라면 자신의 평생 꿈일지라도 돈벌이가 보장되는 것도 아닌 일에 도전하기란 쉬운 결정이 아니다.

“제 아내가 저의 재능을 알아봐 준 거에요. 시작은 아주 오래 전, 살던 아파트의 라디에이터가 노후가 돼 지저분해 보였지요. 집에 있는 나무들을 재활용해서 커버를 만든 일이 있었는데, 저는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주변에서는 ‘소질 있다’, ‘예쁘다’며 칭찬을 해 주었지만요. 그러다가 우연히 집 짓는 일에 도움을 주게 된 거에요. 하다 보니 흥미로웠죠. 아내는 제게 하고픈 일을 하도록 도와주었어요. 아내는 은행에서 10년, 증권회사에서 10년을 근무하고 지금은 자영업을 해요. 가정경제를 일정 부분 담당해주고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적극 권유했어요. 아주 든든한 동반자입니다.”

구들이 놓인 방에는 전통 가구가 있었는데, 눈에 예리하게 들어온 것은 조각보였다. 취미로 규방공예를 하고 전통자수를 한다니 그의 아내가 남편의 미적 감각과 재능을 알아보는 촉이 없었을 리가 없다. 특별한 재능과 감각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공과는 무관한데, 건축과 가구 만드는 일을 어떤 경로로 배우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집 짓는 일을 도우며 이론보다는 실전에서 먼저 체득해서 건축과 목재에 이론과 함께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해서 경기도 광주 오포에 있는 우드아카데미 명장을 찾아가서 숙식을 하며 배웠고 구들장을 놓고 건축 구조를 세우는 일을 배우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전통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주로 디자인 서적을 보며, 해외 건축 관련 박람회도 다니며 독학을 하고 있어요.”

지금 사는 집을 직접 지으면서도 많이 배웠다. 몸으로 직접 부딪히며 보조인력 한 명 없이 오롯이 혼자 해냈다.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살며 기초를 하고 구조물을 만들고 들보를 올리고 지붕을 씌우는 일도, 수도배관이나 아궁이를 들이는 일도 혼자서 했다. 그렇게 2년간 집을 짓고 살면서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미닫이문을 달고, 실내 가구와 소품도 만들어 인테리어를 마쳤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면 굉장히 뿌듯하겠다고 말씀들 하시지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처음이라 다 어설프고 맘에 안 드는 구석도 많아요. 그런데 구들은 참 잘 놓았어요. 전통적인 방식에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을 더했어요. ‘베루누이의 법칙’을 응용해 유속조절을 화기조절에 응용한 것이죠. 장작 서너 개면 밤새 따뜻해요. 가끔 전통을 고집하는 분들을 보면 이럴 때 좀 답답하죠.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드는 일에 사람을 생각하고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을 조금 더할 뿐 무슨 철학은 없어요. 혼자하기를 좋아하고 다소 내성적인 성격이라 사람들과 잘 안 어울려 그저 저는 제 식대로 해요.”

‘베루누이의 정리’는 압력과 속도는 반비례하고 그 합은 전압(全壓)으로 그 값이 일정하다는 이론이다. 말은 그만큼 해도 일에 있어 연구하고 몰두하는 꼼꼼한 면이 가구에서나 정돈된 집 안팎에서나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럴싸하게 자신의 신념을 포장할 줄 모르는 정직한 사람 같았다. 그의 가구에서는 비대칭이면서도 균형과 조화를 느낄 수 있다. 칠을 하지 않았는데 불을 이용한 색감은 세련되고 그윽했다. 그는 주로 질 좋은 수입목재를 이용한다. 이미 가공을 다 거친 나무는 수분이 14~16%로 잘 건조되어 뒤틀림이나 갈라짐이 없다.

“가구를 만들며 나무를 만지는 일이 가장 행복해요. 제게는 편안한 안식을 주는 즐거운 일이에요. 가구는 처음 만들었을 때가 가장 예뻐요. 시간이 지나면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관리상태에 따라 아주 엉망이 되기도 해요. 그래서 잘 관리하는 법도 알아야 해요.”

하루 목공방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1년에 1천만원이 고작이다. 알음알음 지인들을 통해 주문 가구를 만들어 생긴 수입이다. 지금까지는 몸으로 부딪히고 배우는 일에 투자를 많이 했다. 앞으로는 수입도 늘어야 할 텐데, 이곳 하루 목공방의 운영에 변화를 줄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했다.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홍보도 하려고 합니다. 막상 알리려고 하니 춘천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산골에 묻혀 있으니 걱정이 되기는 해요. 작은 별채는 소모임 공간으로 대여도 하고 본채 데크에 카페 공간도 만들려고 해요. 커피집들의 커피보다는 제가 담근 차를 내어놓고 목공체험도 가능하다면 시도하려고 합니다. 잘 될지 어떨지 모르겠어요. 다양하게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보면 제 가구를 알리는 데도 도움이 되겠죠. 새로운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에게 춘천이란 아직 낯선 동네일거란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아내가 춘천여고를 나왔기 때문에 결혼 후 처가에 자주 다니러 왔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때는 강릉에서 춘천으로 수학여행을 왔는데, 그때 원창고개, 교대, 소양강댐을 보았던 기억이 나요. 그때 나이 50쯤 되면 꼭 춘천 와서 살아야지 했는데, 5년이나 빨라진 셈이네요.”

인터뷰 이후 식물공부를 하기 위해 몇몇 지인들과 벚꽃이 만발한 깻길을 지나며 홍천 씨에게 차를 얻어 마셨다. 허브차에 비트 한 조각으로 붉게 찻물을 우려 작은 감동을 주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초여름 어느 하루, 물소리 따라 깻길을 걸으며 하루를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김예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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