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강 물줄기를 거슬러 오른다. 춘천댐 건너 말고개를 지나는 동안 시원스런 강바람을 맞으며 가끔 차창으로 내미는 손가락 사이로 지나는 훈풍과 여린 잎들의 은빛연두가 초록으로 번지는 산빛이 봄의 끝자락임을 체감케 한다.

말고개터널을 지나 신포리 검문소에서 좌회전 하면 56번 국도가 오탄리 만월고개를 지나 화천군 사창리로 통한다. 오탄리(梧灘里)는 사북면의 최북단으로, 화천군 서오지리 일부와 오리동(梧里洞)과 탄감리(灘甘里)가 합쳐져 생겨났는데, 우리 지명으로 오리동은 ‘우레골’ 또는 ‘우뢰골’이고, 탄감리는 ‘열개미’다.

광덕계곡과 삼일계곡이 만나 용담계곡과 곡운구곡을 거세게 굽이쳐 내려오던 서릿발 같은 물 줄기는 오탄리 마을들을 동서로 돌아나오며 한결 유순해지고 온기마저 품은 채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56번 국도는 오탄1리를 관통하는데, 길 양쪽 버덩으로는 작은 규모의 마을과 논밭과 집들, 길목마다 잘 생긴 나무들 옆으로 간혹 복사꽃 날리는 풍경이 따사롭고 정겹다.

이곳에서 옛 선인 김수증의 〈곡운기(谷雲記)〉와 정약용의 〈산행일기〉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사람들이 있다. 곡운1곡으로 들어서기 전, 김수증과 정약용이 넘었다는 학현(鶴峴: 화우령, 지금의 하우고개)은 장승이 서 있는 입구에서 시작된다. 고개를 넘고 개울을 건너 마늘고개라 불렸던 만월고개를 넘으면 곡운1곡을 만나게 된다.

疊綠稠靑漭不分
숲과 풀 어우러져 분별할 수 없는데
杖頭一嶺又橫雲
지팡이 위 고개에 또 구름 비껴있네.
令人却憶陶弘景
문득 도홍경을 생각케 하니
豐草金籠識所欣
새장보다 무성한 풀을 좋아한 줄 알겠네.


운무가 자욱했을 하우고개의 초여름 산길과 한양을 떠나 시름을 잠시 잊고 더 깊은 골로 들어가는 선비를 상상하며 장승을 지나치니, 곧이어 오른편으로 장수마을이란 표지석과 오탄1리 커뮤니티센터가 보인다.

길 건너엔 오래된 단풍나무와 활짝 핀 복사꽃을 앞에 두고 대문 옆으로 장작이 가지런한 옛집이 있다. 낡은 집이지만 조금씩 개량해서 살고 있는 함태환(76) 씨 집이다. 오탄이 고향인 그는 제대 후 서울에 있는 제지공장에서 30년을 근속하고 퇴직한 다음 고향에서 농사로 소일한다.

“식구들 먹을거리와 3천평 정도 옥수수 농사를 짓는데, 옥수수가 40kg에 9만2천원이니 논농사보다 나아요. 천호동엔 3층짜리 집도 있어요.”

웃는 모습은 서울에서 먹고 사는 일이 쉽지 않았음에도 나름 성실하게 잘 살았노라 스스로를 칭찬하는 듯했다. 56번 국도를 따라 조금만 가면 상규교가 있다. 다시 물길이 시원스레 열리고 활짝 핀 백로의 날갯짓이 여유롭다. 다리 건너기 전 대추나무골임을 알려주는 입간판을 보고 좌회전을 하면 지촌천을 따라 우레길이 나란히 나있다. 상규교 바로 아래로는 농로로 이용하는 듯한 오래된 다리가 난간이 부서진 채 방치돼 있어 위태롭다.

다리 끝에는 질경이 돌솥밥과 민물매운탕을 하는 식당이 있다. 식당 안에는 질경이나물과 장아찌 등 반찬류와 약초 술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질경이나물밥은 특유의 쌉쌀한 맛을 없애고 부드럽고 고소했다. 주인장은 대구에서 시집 와 이곳에 정착한 지 15년 되었다. 남편인 오탄2리 이장 김광순(58) 씨의 고향은 화천이다.

마을에서는 5년 전쯤 건국대 교수를 초빙해 약용식물 강의를 개설했다. 그때 한식조리사 자격증반도 열었는데, 호응이 좋아 마을사람들이 조리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질경이에 매료되어 영농법인을 만들어 질경이를 재배하고, 나물과 김치로 가공판매까지 한다. 그 외에도 잣, 메주, 장 등을 판매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5월부터 10월까지 뗏목 만들어 타기, 물고기 잡기, 질경이 채취, 질경이 김치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을 해요. 숙박시설과 체험관을 갖춘 산촌생태마을을 운영하고 있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산골 열린 음악회를 매년 열었어요.”

김 이장의 어머니(95)는 오탄리 최고령으로 실향민이다. 어머니는 철원, 아버지는 황해도가 고향으로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터를 잡았다. 식당 한편에는 붉은색과 파란색 실로 바느질을 해 술을 만들어 코를 붙인 작은 버선들이 가득한 커다란 술병이 있다. 가족과 고향의 안녕을 기리며 통일의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코뚜레에 버선을 달아 동네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우리 어머니는 지문이 없어요. 종이학을 수만 마리는 만드셨을 거예요.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동네 사람들 다 나눠주며 통일을 바랬어요.”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연일 들으면서 잔뜩 고무되기는 했으나, 할머니의 기다림은 너무 오래됐다. 식당을 나와 오탄2리 콧구멍다리로 향했다. 다리 양쪽으로는 마을주민이 운영하는 민박집이 여럿 있다. 봄비 치고는 제법 많은 양이 내려 콧구멍다리는 곧 잠수할 태세다. 이 다리가 잠기면 우레골과 열개미는 56번 국도로 돌아다녀야 한다. 다리가 없던 시절엔 뗏목을 타고 건넜다. 56번 국도는 군인들의 이동경로라 오래 전부터 있던 길이다.

십 수 년 전 처음 이 마을에 방문했을 때, 난간이 없는 이 다리가 낭만적이었다. 여름 밤 다리에 걸터앉아 손낚시로 돌메기를 잡거나 물속에 들어가 다슬기를 잡기도 하고 족대질을 했었다. 콧구멍다리 가운데서 바라보는 지내천 가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이어지고 사이사이 작은 모래톱들이 어찌나 반가운지 모른다. 이제는 춘천의 천변에서 모래톱을 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지 않은가! 오랜 시간 바위틈에 자리한 산철쭉들이 한창이다.

3년 동안 계획하고 있는 마을사업인 둘레길이 올해 완성된다고 한다. 지촌천 옆 숲길을 걷다가 징검다리를 건너 천변에 병풍처럼 둘러진 바람바위를 지난 다음 다시 징검다리를 건너 오탕폭포에 들렀다가 콧구멍다리로 되돌아오는 구간이다. 비가 많이 온 터라 징검다리는 건너지 못했다. 며칠 뒤 다시 찾아갔지만 수량이 좀 줄었음에도 징검다리를 건너지는 못했다.

바람바위 앞을 지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크고 작은 바위들을 오르내리며 그곳에 뿌리 내린 산철쭉과 바위나리, 할미꽃, 제비꽃, 벌깨덩굴 등 야생화와 계곡의 물소리에 그만 여기 눌러 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솟는다. 오탕폭포를 가기 위해 대추나무길로 들어섰다.

대추나무골 길에서 만난 김경순(50) 씨는 이곳이 고향이다. 그는 1만여 평의 옥수수 농사를 짓고 있다. 오탄리 옥수수는 맛있기로도 유명한데, 또 다른 품종으로 제약회사에 옥수수 수염과 속피를 납품한다. 수입이 안정적이다 보니 논을 밭으로 바꾸어 옥수수 농사를 많이 짓는다. 옥수수 외에 약초나 인삼 등 특용작물 재배도 많이 하고 있다. 오탄리의 청년회는 30여명으로 활성화가 잘 되어 있으며 화합도 잘된다고 했다. 귀농이나 귀촌가구도 늘었다고 하니 흐뭇한 일이다. 그는 자주 잠기는 다리가 불편해서 새 교각이 건설되길 바라고 있다.

김씨와 이야기를 나누며 발걸음이 멈춘 곳은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논물을 댄 집이었다. 정갈하니 화초가 드문드문 보이는 시골집에는 앞마당처럼 다랑이논이 있다. 유경환(85) 할아버지와 김선임(81) 할머니 노부부에게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지는 오탄리에서 나고 자랐다.

“왜정 때는 놀미 산자락에서 살았지. 고개를 두어 개 넘어 군인차나 삼판차가 있으면 겨우 얻어 타고 학교를 다녔지. 너무 힘들어 며칠 댕기다 말고는 해방하고 또 학교를 나갔지. 그때는 하도 가난해서 겨울 지나면 곡식이 다 떨어지고 없었어. 어릴 땐 하얀 이밥이 제일 먹고 싶었어. 아무리 없이 살아도 제사나 명절에는 먹었지. 산으로 들로 나물이라도 뜯어 나물죽을 끓여 먹고 하던 때라 학교는 며칠 다니다 영 그만뒀어. 그래, 졸업장을 못 땄지.”

글을 몰라 불편하다가 그냥 어깨 너머로 배워 저절로 한글하고 숫자는 다 알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다니던 학교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오탄1리쯤 있었는데 지금은 밭이 되어 흔적이 없다고 했다. 이 마을 아이들은 1929년에 세워진 지촌초교를 다니거나 1942년 생긴 오탄초교를 다녔다. 오탄초교는 1999년 폐교돼 지금은 지촌초교를 다니고, 중학교는 신포리로 다닌다. 5남매를 두었는데 다들 도시로 나가 밥벌이를 하며 잘 산다 했다.

“한 번은 놀미에 크게 산사태가 나서 그때 화전민들이 많이 죽었어. 그리고는 화전민을 정리한다고 나라에서 그때 돈 40만원을 줘서 다 내 보냈지. 40만원이면 좋은 집은 아니래도 시골집 작은 거 하나에 땅 천 평이나 천오백 평은 살 수 있었어. 그리고는 놀미에 화전민이 다 없어졌어.”

할아버지는 자식들 먹이느라 논농사를 포기 못한다.

“이 논이 1천500평인데, 이거 농사지으면 스무 가마 나와. 소를 부릴 때는 기계 값은 안 들었는데 지금은 품값과 기계 값에 손해야. 그래도 용돈으로 애들이 좀 보내주니 그걸로 쌀이라도 대는 거지. 방에 들어 앉아 우두커니 있느니 운동 삼아 짓는 거야.”

할아버지 말씀을 뒤로 하고 오탕폭포로 발길을 돌렸다.

오탕폭포는 둘레길로 가거나 콧구멍다리를 건너 대추나무골을 지나 56번 국도변을 따라 가는 방법이 있다. 마을 폐비닐 처리장 아래로 50m 정도 급경사 길을 내려가면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정자가 보인다. 작은 개울을 폴짝폴짝 건너면 오탕폭포가 3단으로 떨어져 너럭바위를 지나 길게 흐른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장관이었다. 주변 바위나리 잎은 손바닥만 하게 크고 싱싱했다. 물소리와 물보라의 청량감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오탄리는 어느 곳에서 봐도 근경이든 원경이든 아름답고 생기 있는 마을이다.

김예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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