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뭐 볼 것도 없는데….”

마을탐방을 나왔다는 말에 월송리가 고향이라는 한 주민의 말이었다. 서면은 외지사람들에게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 이름난 곳이다. 대개는 의암댐 쪽에서 삼악산 아래 403번 강변길을 택한다. 작은 섬들이 이어지는 강변길을 달리다 보면 저 멀리 보이는 섬 안의 나무들이 강마을의 운치를 더하고, 자욱한 물안개라도 만나면 몽환적 풍경에 그만, 가슴 속 어느 한 구석에 잊고 있었던 막연한 그리움도 스멀스멀 올라온다.

애니메이션박물관을 지나면서 강변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충만했던 감성이 사그라질 때쯤 월송리로 접어드는 길목에 이른다. 하지만 어느 가을, 강변길 안쪽마을이 궁금해 들어섰던 자궁 속 같은 황금들녘, 호수가 주는 애상적 분위기와는 달리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 푸근함의 첫 느낌을 잊지 못한다.

문학공원 건너 잠시 들른 ‘서면마트’에서 아주 반가운 이를 만났다. 제비 부부가 둥지를 튼 처마 아래, 암컷은 알을 품고 있었다. 수컷은 집 앞을 떠나지 못했다.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 한 번도 쉬지 않고 서해바다를 건너 이곳에 둥지를 마련했을 것이다. 새끼가 날 수 있게 되면 갈대밭으로 둥지를 옮겨 지낸 후 밤바람이 차가워지기 전에 새끼들을 데리고 또 먼길을 떠나리라. 얘들아, 내년에도 꼭 오너라. 고향으로….

넋 놓고 제비를 보다 수컷의 불안한 동태에 자리를 비켜주었다. 서면마트를 끼고 뒤편으로 이어진 길은 월송3리로 가는 입구다. 입구의 금산리 땅을 지나 논밭 사이로 난 가르마 같은 농로에는 귀룽나무 꽃이 개울가 옆에서 저물고 있었다. 농지정리를 하기 전에는 구불구불 흐르는 도랑 곁으로 바람에 살랑거리는 수양버들 아래에서 퉁가리를 잡다가 가슴지느러미에 손을 찔려 퉁퉁 붓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수양버들 대신 벚나무들이 자리를 잡았다.

통영에서 나서 여섯 번이나 전학을 다녀 고향과 유년기에 대한 기억이 없이 살았다던 김재환 교수는 2015년에 《월송리 김 교수의 고향 만들기》라는 책을 출간했다. 월송리 탐방에 앞서 사전조사를 하던 중 우연히 만난 책이다. 지내리 맹지를 구입했던 일, 다리도 없는 팔미리 개울 건너 땅에서 집도 못 짓고 초보 농사꾼으로 낭패를 거듭했던 일, 월송리에 정착해서 마을사람들을 따라 관광버스에서 춤을 추었던 일, 처음 목격한 산역꾼들의 회다지 동작과 산역꾼의 소리를 들었던 일 등 월송3리에 손수 집을 짓고 서툰 농사를 배워가며 마을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던 시간들을 솔직하고도 정감어린 필체로 기록했다. 마을회관쯤에 이르자 그 책이 떠올라 여기쯤이 김 교수 댁인가 둘러보게 되었다.

마을회관 건너 언덕 위에는 멋들어진 소나무 군락 옆으로 오래된 붉은 색 사당이 있다. 그 앞으로 펼쳐진 논과 함께 낮달이 어우러진 소나무 군락이 예스럽다. 수령이 그리 오래된 소나무는 아니지만, 그 사이로 달이 뜨는 밤이었다면 ‘月松里(월송리)’라는 지명이 주는 정취가 한층 더했으리라.

사당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니 사당 뒤편 멀지 않은 곳에 잣나무 숲이 보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이곳에서 수정을 채취했다고 하는데, 광산이 생길 만큼의 경제성은 없었던 모양이다.

“광산은 없었대요. 어릴 적엔 이곳에서 주운 수정보석을 주머니에 넣고 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으스댔죠. 많아야 서너 개인데 마치 부자라도 된 듯 말이죠.”

1970년대 금산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주민이 지나며 들려준다. 소나무 군락에 이르기 전, 왼편으로 ‘시골로 간 아이들’이라는 버섯농장이 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젊은 부부는 2014년 귀농했다. 장재원·이송희 부부는 노루궁뎅이 버섯을 주로 재배한다. 농장이름처럼 아이들도 버섯 따는 일을 즐겁게 돕고 있다. 부부는 어린아이들마저 경쟁구도에서 키우고 싶지 않았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애쓰며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자연과 농작물을 일구며 깨달음을 얻어 귀농을 결심했다. 아이들은 서상초등학교를 다니며 서울에서라면 무관심했을 자연과 농사, 마을공동체를 온몸으로 느끼며 성장하고 있다. 노루궁뎅이 버섯은 수확 후 급격하게 맛이 달라지고 보존기간이 짧아, 주로 건조하거나 분말로 판매하고 있다. 9월에는 하얗고 예쁜 노루궁뎅이 버섯을 따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소나무 군락을 지나 ‘월굴’이라 불리던 마을 위로 수정리나 반송리로 넘어가는 작은 산길이 호젓하다. 월송리는 월굴리와 반송리의 이름을 따서 월송리라 한 것인데, 월송2리를 ‘수정’이라 불렀다. 반송리는 큰 반송이 있던 마을로, 반송저수지 부근이다. 수정골에서 4대째 살고 있는 윤용대(86) 할아버지 댁 마당에는 1984년 강원도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된 월송리삼층석탑이 있다. 겨우 차 한 대 지날 만큼의 좁은 시골 소로의 오른편, 대문도 없이 들여다보이는 마당 끝 100년 남짓 된 큰 은행나무 옆에서 삼층석탑은 마당 밖을 갸우뚱 내다보듯 고개를 살짝 기운 채 소박하게 금낭화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마당에는 이정희(84) 할머니가 질펀히 앉아 고사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덜 말랐을 때 이렇게 손바닥으로 싹싹 비벼 놓으면 고사리가 부드러워요.”

열아홉에 방동에서 꽃가마를 타고 이곳으로 시집을 왔다.

“우리 집 앞으로 방동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있었어요. 한 두어 시간 가마를 타고 왔는데, 시집오니까 어르신들이 햇곡식을 거두면 이 탑에 먼저 올리더라구. 그래, 나도 어른들 하시는 대로 여적 했지. 그저 맘속으로 애들이나 잘되라고 비는 거지요.”

이 삼층석탑은 높이 2m의 화강암 석탑으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 주변으로 기왓장이 발견되었는데, 1942년 조선총독부 식산국에서 발간한 ‘조선보물고적조사’ 자료에 의하면 ‘조면사지(造麵寺址)’였다는 기록이 있다. 출토된 기왓장 중에 그 문양이 아름다운 쌍조문(雙鳥紋) 수막새 기와를 운 좋게 볼 수 있었다. 이 문양은 신라양식으로 강원북부에서는 흔하지 않은 기와문양이다. 조면사는 보통의 사찰 이름 치고는 좀 특이하다. 장릉에 제향을 지낼 때 절에서 두부를 만들었다 해서 검단사(黔丹寺)를 한때 두구사(豆拘寺)라고도 했다는데, 조면사(造麵寺)에서도 국수를 만들었지 않나 추정된다.

“우리 마당에서 기왓장이 꽤 나왔지요. 여기 무슨 절이 있었다던가 하는데 그건 모르겠고, 문화재이기는 해도 내 집에 있는 탑이니 우리 탑이려니 하지. 가을이 되면 소제(掃除)가 보통 일이 아니야. 은행이며 낙엽을 주워내기가 영 성가셔요. 우리 시아버지가 심으셨다는데, 나무가 오래돼 놔서 땅 밑에서 뿌리가 너무 자라는가 봐. 저 탑이 저렇게 기울었으니 이젠 베어내야겠어요.”

마당에서 늘 보던 탑이라 특별한 경외심은 아니더라도 집안의 어른을 대하듯 말한다.

석탑이 있는 할머니 댁을 나오자마자 작은 삼거리에 커다란 느티나무 몇 그루가 큰가지를 길 위까지 드리우고 있다. 느티나무가 늘어선 수정2길 방향으로 내려가니 소를 키우는 농가가 여럿 있었고, 노란 애기똥풀이 점령한 묵밭엔 이따금 선씀바귀와 뽀리뱅이 꽃이 뿌리를 내렸다. 논물을 댄 곳에서 한가로이 백로가 먹이를 찾고, 논 옆의 덤불 사이로는 박새가 알을 낳은 모양이다. 말발굽 같이 생긴 월송리 지형 중심에 자리 잡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 월송2리다.

월송리에는 특히 잘 관리된 봉분이 농가 주변에 많다. 길옆으로 파평윤씨 묘와 재실(齋室)인 송윤사(松尹祠)를 볼 수 있다. 유교문화가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전통 있는 마을이란 생각이 들었다.

월송리에는 깊은 숲길보다는 평지 같지만 작고 고요한 오솔길이 더러 있다. 수정고개를 넘으면 신매리인데, 신매리 사람들은 ‘수정고개’라 불렀고 수정리 사람들은 ‘신매리고개’라 불렀다. 이 고갯길을 지나는 길에도 수정사(水井祀; 성주이씨 사당)와 그 뒤로 호암 이준용 열사의 묘가 있다. 선생은 서면 방동리에서 태어나 1894년 동학혁명군에도 참가했으며, 2만여평의 토지를 팔아 의병운동과 독립운동 자금으로도 내놓았다. 1919년 3월 천도교 춘천교구장으로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됐다. 옥중에서 회갑을 맞은 선생의 옥중시는 애니고등학교 옆 박사마을 선양탑 위쪽, 독립열사기념비에 황재국 교수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이 시는 일제의 눈을 피해 고종의 승하를 애도하는 망제를 올리며 나라 잃은 슬픔과 울분을 달랬다던 국사봉의 망제 탑에서도 볼 수 있다.

화장기 없는 얼굴, 투박한 손 같은 월송리. 크게 볼 것은 없지만 제비와 백로를 불러들이는 마을이다. 콩 세 알의 마음으로 아이를 키우는 젊은 농군과 대를 이어 땅을 지키는 사람들과 구석구석 서려있는 마을의 역사는 고향을 잊고 사는 지친 사람들에게 등을 토닥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김예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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