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지난 12일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방침을 발표하자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향해 “매우 똑똑하고 품위 있는(gracious) 제스처”라고 칭찬했다. 지난해 9월 “자살 임무 중인 로켓맨”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외교상의 아름다운 언어는 우아하게 치장한 미인과 같다고 말한다. 그녀는 가장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으로 가장 현실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역사적인 북미회담을 앞두고 말의 성찬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꼭 좋은 말만 오고가는 것은 아니다. 때론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과도한 주문을 늘어놓기도 하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 단호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까 노심초사해 자유한국당 정치인들처럼 무작정 어깃장을 놓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평화로 나아가는 물결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물살이 빨라졌다.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예측할 수 없었던 반전이지만, 남북한 내부상황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의 변화가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미병(弭兵)! 이제 전쟁을 멈출 때가 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인 기원전 546년, 춘추시대의 패권을 다투던 진(晉)나라와 초(楚)나라가 휴전협정을 맺었다. 전화가 끊이지 않던 시대에 잠시나마 평화가 찾아왔다. 사가들은 이를 두고 정치의 승리라고 했다. 이 미병을 가능케 한 주인공들은 진나라 정경(正卿)인 조무(趙武)와 초나라 영윤(令尹)인 굴건(屈建)이었다. 이 두 강대국을 번갈아가며 조정자 역할을 한 사람은 헨리 키신저에 비견되는 송(宋)나라 좌사(左師) 상술(向戌)이었다.

미병협정이 가능했던 배경은 당시의 여러 상황들이 복잡하게 맞물려 있는 것이라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겠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근본적 문제의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즉, “병기(兵器)는 상서롭지 못하고 전쟁은 백성을 해친다”는 것이다.

가장 큰 안보는 평화다. 평화는 신뢰가 전제돼야 성립할 수 있다. 진과 초의 미병회담에서도 서로를 의심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조무와 굴건 같은 큰 정치인과 이들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상술이 있었기에 결국 회담이 성공할 수 있었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은 스스로 상술과 같은 조정자가 되어 피스메이커(Peace-maker)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는 곧 동북아 평화의 보증수표이며 세계평화로 나아가는 관문이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접점이자 소통의 창구인 한반도는 평화 그 자체여야 한다. 100년도 더 전에 한반도 중립화론이 꾸준히 거론된 적이 있었다. 청일전쟁 전후에는 일본에 의해, 러일전쟁 전후에는 러시아에 의해 중립화론이 제기됐지만, 이는 모두 한반도를 둘러싸고 자국의 세력이 불리하자 궁여지책으로 내세운 논리였다. 이후 고종황제가 주체적 입장에서 중립화를 추진했지만 아무런 힘이 없는 대한제국의 중립화론이 실현될 리 만무했다.

남북이 서로 원하지 않는다면 꼭 통일이 돼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평화공존은 포기할 수 없다. 남북이 서로 다른 체제를 용인하고 신뢰로써 불가침을 약속한다면 통일이 아니어도 좋다. 남북이 서로 협력해 세계평화의 조타수로서 한반도를 중립지대로 만들 수 있다면 이 또한 멋진 일이 아니겠는가!

전흥우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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