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산골교육센터 윤요왕 대표

고탄리를 둘러보고자 약속시간보다 훨씬 일찍 갔다. 인터뷰를 하기로 한 윤요왕(47) 씨가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아 기다리는 동안 ‘솔다원나눔터’ 1층에서 일하고 있는 마을 ‘어르신’ 세 사람을 만났다.

“우리도 송화초등학교를 다녔지. 다 동창생이야. 여기 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우리 동네에서 학교도 없어지고 애들 구경도 못 했을 거야.”

어르신들은 모두 80대다. 시간이 다 되어 이순미(51) 선생님이 2층으로 안내했다. 이씨도 어르신들과 동문이고 마을에 거주한다. 한결같이 환한 표정과 웃음이 가득한 그들을 보며 별빛산골교육센터가 이 마을에 가져다 준 행복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했다.

별빛산골교육센터 윤요왕 대표.

“제 이름이 세례명인데, 아버님이 워낙 독실한 가톨릭 신자셨어요. 그래서 아버님은 제가 신학대를 진학해서 사제가 되기를 바라셨지요. 사제로 평생 산다는 것에 용기가 없었어요. 그래서 1991년 무역학과에 진학했는데, 전국가톨릭 대학생연합회에서 활동을 했어요. 학생운동만 하느라 공부도 안하고…. 이런 얘기는 쓰면 안 되는데…. 4년 내내 평점이 1.75쯤? 그랬어요.”

유쾌하고 시원시원한 그는 상대를 금세 편안하고 친밀하게 만들었다.

“각 교구별로 연합회가 있어 대학생 동아리활동을 했지요. 졸업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천주교인권위원회 명동성당 앞에 있는 카톨릭회관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죠. 당시 인권단체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인권유린 현장은 어마어마했어요. 양지마을 사건이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양심수 석방운동, 무료법률상담 등 주로 공권력으로부터 침해받은 인권문제를 다루었어요. 1년 반 정도 근무하던 중 원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실무자를 지역에서는 구하기 어려웠던 터라 자리를 옮겼어요. 거기에서 4년 넘게 일을 했지요. 그러다가 귀농을 결심했어요.”

대학시절 가톨릭연합회 학생들과 이 동네로 농촌봉사활동을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막연하게 나중에 여기 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스팔트 위의 학생운동과는 달리 흙을 밟고 만지며 어르신들과 삶의 현장에 있는 것이 좋았어요. 인권운동을 하면서 정신적 에너지 소비가 크기도 했지만 당시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어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온 건데, 그들을 가슴으로 대하던 초심과는 달리 매뉴얼대로 형식적이고 사무적이게 대하고 있었어요. 그런 나를 보면서 ‘과연 이일을 끝까지 할 수 있을까’ 스스로 반문하게 되었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의가 들어왔을 때도 ‘인권운동이 가치 있고 필요한 일이지만 서울에 가서 행복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을 하면서 다른 일을 찾게 된 것이 귀농이었어요.”

2003년, 그는 미혼이었다. 선배가 동네에 살고 있어 1년간 적응기간으로 삼고 농사를 배우고 집을 구하러 다녔지만 빈집이 있어도 살 집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경험도 없는 선후배들과 직접 집을 짓고, 농토를 마련하고, 결혼도 했다. 아내는 화천으로 학교를 옮기고 아이도 낳았다. 아내의 동의와 경제적 지원이 큰 도움이 되었지만, 아내가 출근하고 어린아이를 돌보며 농사를 짓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동네 학부모들과 상의해 2005년 공동육아개념으로 작은 공부방을 개설하고, 2007년 지역아동센터로 등록했다. 상근자도 두고 좀 여유가 생기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아이들이 줄어 송화초등학교가 폐교위기가 몰린 거예요. 우리 아이도 다니고 있고, 귀농·귀촌자들도 늘었는데, 학교가 없어지면 큰일이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산촌유학이에요.”

 

그는 산촌유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일본으로 건너갔다. 우리나라는 산촌유학이란 개념도 잘 모르던 시절로 겨우 몇몇 산촌유학이 생겨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직접 가서 보고 연구결과들을 검토했다. 일본의 기숙형 산촌유학이 마을과 고립되어 마을사람들과 학교 아이들과 섞이지 못하는 등의 문제점들을 보고 그는 복합형 산촌유학의 밑그림을 그렸다. 사회운동가의 유전자가 농촌현실을 그냥 보고 지나치지는 못했으리라.

“산촌유학은 대안학교처럼 아이들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에요. 마을은 아이들의 삶의 터에요.
지속가능한 산촌유학은 마을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산촌유학의 정체성은 시골에서 작은 학교를 다니며 시골생활을 체득하는 것이에요.”

처음에는 농가에서 등교하고 하교 후에 센터에서 여러 방과후 활동을 한 후, 농가에 돌아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저녁시간을 보내는 형태로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늘면서 마땅한 농가를 찾기가 어려울 때가 종종 생겨났다. 그런 경우에는 센터의 기숙사와 농가에서 번갈아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다. 처음엔 아이들이 농가를 비교하기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아이들을 비교하기도 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학부모 회장이었던 이순미 선생님을 스카우트 했어요. 이 마을 출신이라 어르신들과의 소통이 원활했고 관계역할이 중요했어요. 한 달에 한 번 농가회의도 하고 어르신들에게 교육도 했어요.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운 일이 생겼어요. 언젠가부터 어르신들과 아이들 간에 끈끈한 무엇인가가 생기는 거예요. 아! 가능성이 보였어요.”

아이들이 장기간 부모와 떨어져 지내면 애착관계에 문제가 있지는 않을까? 과연 정말 행복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할 수 있어요. 제가 교육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현장에서 보고 느낀 저는 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어요.”

도시의 가정에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보살핌을 온전히 받고 있을까? 우리의 교육문화는 과연 건강한가? 도시 아이들은 하교 후 학원을 전전하고, 지쳐서 귀가한 부모님과의 대화는 할 일을 확인하는 수준일 정도로 서로 시간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이곳에서 흙을 만지고, 냇가에 뛰어들고,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우리 아이들은 핸드폰을 찾지 않아요. 도시는 다 가지고 있으니까 가져야 하고, 다 가는 학원이니 가야 하는 거죠. 경쟁구도에 내몰리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체험을 통해 선택권을 주자는 것이지요. 아이들의 적응력은 놀라워요. 공동체문화를 스펀지처럼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별빛산골교육센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아이들을 산촌으로 유학시켜 잠시 떨어져 지내는 동안 부모는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를 갖게 되고, 아이들을 찾아오면서 이 마을과 인연도 맺고 위안을 삼기도 한다. 방학 때면 단기체험도 있고, 전학하지 않고도 교장 선생님의 허락이 있으면 작은학교 생활도 가능하다. 윤 대표는 춘하추동의 시골생활을 경험하면서 학기가 시작되고 끝나는 1년간의 유학을 권한다. 2010년 4명의 유학생으로 시작해 지금은 24명의 유학생이 이곳 송화초등학교에 다니며 생활하고 있다. 송화초에는 50여명의 학생들이 있다. 2014년 별빛산골교육센터는 교육부로부터 사회적기업으로 인가를 받았다. 공식명칭은 별빛사회적협동조합으로 산골유학센터, 지역아동센터, 노인복지센터가 여기에 속한다. 그는 하우스와 노지에서 3천여평의 농사를 지었지만, 지금은 ‘바람꽃협업농장’을 10여명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 마을 일과 센터 일 때문에 농사에만 시간을 쏟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 농촌에는 촌(村)은 사라지고 업(業)만 남았어요. 농산물만 생산하는 개념으로 농촌문제를 접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에요. 마을에는 사람이 있고 아이들이 있어야 해요. 마을이 아이들을 키우고, 아이들이 행복한 마을을 만들고 싶어요.”

바람직한 농촌의 모습이 보였다. 한 사람만의 노력은 아니었겠지만, 리더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했다. 20년 가까이 쉼 없이 달려왔다. 어린 딸을 데리고 새벽까지 마을회의에도 나가야 했고, 학교와 학부모,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해냈다. 앞으로의 소망을 물었다.

“우선, 9월 중순까지 마지막 토요일마다 시골장터를 열어요, 도시민에게는 쉼터가 되고 9월 작은 음악회와 함께 마을축제로 잘 안착되기를 바라고요. 내년엔 유럽의 농촌들을 돌아보고 농사를 지으며 배우고 싶어요. 독일어도 배우고 싶어요. 그런데 내년에 삼 농사 때문에 시간이 날지 어떨지는 모르겠어요.”

좌충우돌 마을의 여러 문제들을 헤쳐 나가며 지칠 법도 한데, 긴 시간 마을과 아이들을 이야기 하는 내내 그는 신명이 나 있었다. 존경하는 선생님의 말을 인용하며 작은 목소리로 “좋은 생각은 말로 하는 순간 반으로 줄고 글로 쓰면 또 반이 준다면서 행동하라고 하셨지만, 제가 경험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라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현대사회에서 가정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 우리는 과연 다양한 교육방법을 모색하고 있는가에 대해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윤요왕 대표의 아이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김예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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