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물안개로 가득할 때면 세월교 앞에 서는 날이 많았다. 집에 사람이 있어도 외로움은 불쑥 찾아온다. 이방인으로 어디 하소연할 데 없던 날, 물소리에 내 소리를 보태곤 했다.

물안개 자욱한 세월교에서.

세월교와 월곡리. 매우 흔한 이름이다. 전국에 수많은 세월교와 월곡리가 있는데, 이름이 참 정겹고 궁금했다. 세월교는 소양강댐이 수문을 열면 잠기는 잠수교다. 다리를 씻으면서 넘친다는 의미의 세월교(洗越橋), 달을 씻는다는 뜻의 세월교(洗月橋), 무심히 흐르는 세월의 세월교(歲月橋), 초승달을 의미하는 세월교(細月橋) 등 사람마다 다양한 풀이가 가능한 것은 애초에 한자로 기록되지 않았던 탓인 모양이다. 달은 내 마음이요, 달을 씻는다는 것은 내 마음을 씻어내는 일이라니 얼마나 시적인가! 오래 전 제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이렇게 새겼다.

세월교 바로 옆에 새 교각이 높게 세워지고 있다. 오랜 시간 춘천사람들의 마음을 씻어 내리던 다리는 철거될 예정이다. 자꾸만 옛 정이 사라지니 서글픈 일이다. 그대로 두어 걷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낚시도 즐기며 여름밤의 낭만을 대대로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암산을 휘돌아 나오는 금옥길 주변으로 마을을 이룬 월곡리는 그 모양이 초승달이 살짝 누워있는 형국으로, 마을 뒤로는 빙산(깃대봉)과 매봉산이 감싸고 있다. 금과 옥처럼 달빛이 아름다운 골짜기 금옥골. 밤에 하늘에서 금옥골을 내려다보면 골짜기에도 초승달이 그려질까?

세월교를 건너 남단 끝 가마골식당의 표지판이 보이는 곳이 월곡리 입구다. 마을회관이 있는 중심이 2반, 지내리 방향이 1반이다.

가마골은 소양강댐 때문에 수몰된 마을로, 지금은 식당이름으로 불릴 뿐이다.

월곡리 3반은 맑은 도랑이 흐르는 좁다란 마을길에 전원주택들이 잘 어우러져 있어 마을길이 예쁘다. 입구에서 멀지 않은 도랑가에 ‘사금 캐는 곳’이란 작은 나무 팻말과 함께 나무계단으로 잘 정비 된 매봉산과 빙산 들머리가 있다.

옥광산으로 유명한 금옥골에는 금광과 사금을 캐던 곳이 있었다. 사금 캐던 곳은 붉은 쇳물이 흘러 ‘쇠골’이라 불렸다. 동네 어르신도 사금을 캤었다고 한다.

이른 아침 홀로 빙산에 올랐다. 산이 높지 않아도 소양댐과 호수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매봉산으로 향하는 능선의 솔향이 좋다. 노송들 아래에서 보는 강줄기와 샘밭의 넓은 들은 사람들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부터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산 이유를 대번에 짐작케 했다. 매봉산 정상에는 느랏재와 가산초교, 옥광산 방향의 이정표가 있다. 느랏재로 이어지는 능선은 다음 기회로 남겨두고 되돌아 나왔다.

사금 캐는 곳에서 200m쯤 가다 오른편 소나무 숲길에서 발길이 멈추어진다. 입구에 월천사와 산 갤러리라는 안내판이 있지만 숲에 가려져 있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몸은 저절로 숲으로 향했다. 200여m쯤 오르자 스카이블루로 칠해진 아담한 법당과 요사채가 있다. 그 옆으로 갤러리가 있는데 평상과 마당의 소품까지도 온통 블루다. 마침 스님이 계셔서 갤러리 안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작품의 주 컬러도, 전시장의 벽면도 스카이블루였다.

“블루는 우주와 생명에 의미를 두고 있어요. 불자들이 오면 정서적으로 마음의 위안이 될 수 있도록 만든 갤러리입니다. 피안의 세계에 대한 작업을 하는데, 일흔을 넘어서니 쉽게 내 맘에 들지 않아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고 있어요.”

도량 끝으로 오동나무 작은 구멍에 딱따구리가 날아들었다. 며칠 뒤 가까이에서 관찰할 생각으로 다시 찾아갔건만, 한참을 기다려도 새는 오지 않았다.

“사람에게 들킨 것 같아 둥지를 떠났어요.”

월천사를 지나자 청둥오리 알을 파는 집과 나란히 황토 흙이 그대로 드러난 옛집이 정답다. ‘금토’의 ‘문화통신’에서 만든 《달빛 골짜기 옥빛 사람들》이란 책에는 두 집의 할머니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뿐 아니라 이 마을의 역사와 사람들의 숨결까지 자세히 담겨있다.

두 할머니 집을 지나자 산에는 벌목을 하고 난 자리에 자작나무 어린 묘목이 가득했다. 전에 보았던 아름다운 송림은 사라졌다. 아쉽지만 10년 후엔 자작나무 숲을 시내 가까이에서도 볼 수 있겠다는 걸로 위안을 삼으며 마을 중간쯤 이르자 도로가 넓어졌다. 예전에 느꼈던 마을길의 운치는 싹 달아났다. 게다가 멀리 보이는 ‘달아실’ 앞산이 민둥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부근 텃밭에서 풀을 뽑던 마을 주민을 만날 수 있었다.

“개인 소유인데 산주가 재산권을 행사한 거죠. 무어라 할 수 없죠. 옛날에는 우리 마을 소나무가 아주 일품이었지. 나 어릴 적엔 저 산에 두 아름씩이나 되는 소나무들도 꽤 있었어요.”

저 산에 기대어 살던 수많은 생명의 터전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생각하니 씁쓸하고 허허로웠다.

작은 마을이지만 월곡리의 역사는 깊다. 고대 부족국가 맥국의 왕릉이 있던 곳을 ‘능산’이라 불렀고, 류근동 할아버지 댁에는 고려시대 옹기터도 남아 있다. 고려 말 파주염씨들이 혼란기를 피해 개성에서 이주해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장학리에 있던 명당 묘자리를 민병휘에게 빼앗긴 얘기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우리 동네에는 순흥안씨들이 많아요. 옛날에는 안향 선생의 영정을 모셔 제를 지내기도 했대요.”

전 이장을 지냈다는 안관섭 씨는 주자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 선생의 영정이 있던 마을을 영당말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영정이 소수서원으로 옮겨져 있다고 했다. 먼 과거가 아니라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당시 피란처로 사람들이 숨어들었고, 소양강댐이 생기기 전에는 똑딱선을 타고 강을 건너 샘밭에 장을 보러 다녔다. 소양강댐 건설로 돈 벌러 들어왔다가 공사가 끝나고 쑥 빠져나간 사람들의 얘기도 광산에서 일했던 어르신들을 통해 살아 이어지고 있다. 유서 깊은 마을인 만큼 골짜기마다 붙은 많은 지명이 전해온다.

“여기는 물이 귀해서 ‘건드레’라 했어요. 우리 집 저 뒤쪽에 있는 개울에서 빙빙 고개를 돌아 물을 끌어와 썼지. 또 저 건너 산에는 일제 때 목이 잘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머리 없는 불상이 있던 골짜기는 ‘부채지골’이라고 했고, 서낭당 옆으로 송장고개도 있지. 여긴 여서낭당, 남서낭당이 따로 있었는데, 내가 이장 볼 적에 없어진 서낭나무도 다시 심고 살려 보려했지만 잘 안 되었어.”

‘덧보데이’, ‘탑산골’, ‘가마골’, ‘쇠골’, ‘큰점’ 등 안관섭 씨 덕분에 옛 지명 얘기를 즐겁게 들었다.

월곡리의 가장 큰 변화의 중심에는 옥광산이 있다. 1968년 문을 연 대일광업은 곱돌광산이었다. 우연히 발견된 옥맥으로 1974년 옥광산이 되었다. 세계 최고의 연옥을 6개 광구에서 연간 150톤을 채굴한다. 마을사람들은 광산에서 채굴을 하거나 옥을 세공하는 일을 하고, 옥 동굴체험장에도 사람들의 발이 끊이질 않아 농산물을 팔거나 민박이나 식당을 운영해 농가소득에 꽤 도움을 얻고 있다. 옥광산 옆 ‘달아실’이라는 건물에는 권진규 미술관과 장난감 박물관, 차상찬 잡지기념관, 갤러리 등이 있고, 달아실 앞에는 ‘그빵집’이, 뒤편엔 공원이 있어 문화예술과 함께 즐길 거리가 풍요로워졌다. 평일인데도 주차장에는 관광버스가 몇 대 있었고, 산골 카페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 변화의 바람 속에 금옥골의 옛 정취도 녹아 흐르길 바란다.

돌아오는 길, 아카시 향 가득한 강변길 아래로 군인들의 위장초소와 흡사한 가시박 덩굴이 나무들을 먹어 삼키고 있었다. 어릴 적 하천가에 소복소복 도란도란 피어있던 ‘고마리’, ‘닭의장풀’이 그립다.

김예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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