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골에 살고 있는 최성각(63)은 강릉 출신 소설가다. 어떤 이들은 그를 일러 ‘한국의 대표적 생태주의 작가’, 혹은 ‘생태사상가’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가 운동과 심층생태학으로 해석될 수 있는 글을 병행한 드문 작가이기에 붙여진 별칭일 것이다.

14년째 춘천에 살면서도 춘천사람들과는 교류가 별로 없고, 신매대교와 소양2교는 터미널에 갈 때와 장보러 갈 때, 또는 책방에 들를 때나 건너고 나머지 시간은 툇골에 파묻혀 지낸다. 사람을 일부러 피한 게 아니라 ‘춘천사람들’을 알지 못해서였다고 한다. 그래서 《춘천사람들》이 그를 찾아갔다.

서면의 툇골은 조선 중종 때 윤세호라는 선비가 사화를 피해 들어왔다가 궁벽해서 오래 못 견디고 나갔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풀꽃평화연구소는 마을 초입에서 골짜기로 난 시냇물 옆 수림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툇골에 들어온 때가 2004년이니 얼추 열 세 번의 겨울을 보낸 셈이다. 작가는 오래 전에 “막힌 툇골이 나의 출구다”라고 밝힌 적이 있었다. 무슨 뜻일까?

제가 들어오기 전에 풀꽃운동을 같이 벌였던 정상명 선생님이 이미 자리 잡으셨지요. 저는 마침 골짜기 안에 빈터가 생기자 단체를 회원들에게 넘기고 “이때다!” 하고 들어왔지요. 누군가는 궁벽해서 나갔다는 이곳을 저는 새 삶과 겪지 못했던 정신의 구축을 위한 생성의 땅, 오아시스 같은 곳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냐, 그때나 지금이나 주류들은 나가거라. 비주류인 나는 덜 망가지고 덜 오염된 이 외진 곳이 희망의 장소다.” 그런 심사로 그렇게 말했던 거죠.

그가 말한 단체는 환경단체 ‘풀꽃세상’이다. ‘풀꽃세상’은 새나 돌멩이, 갯벌의 조개 등 사람이 아닌 대상에게 환경상을 ‘드리는’ 생태적 감성의 운동방식으로 주목을 받았다. ‘풀꽃세상’은 스스로 성찰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참회의 중요성에도 방점을 찍었다. 그렇기에 그가 2001년 최초의 ‘삼보일배 운동’을 창안하고 ‘생명평화’라는 개념을 창출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976년 강원일보, 1986년 동아일보에 신춘문예로 등단해 그의 공적 정체성은 소설가지만, 그가 쓴 글은 그 형식이 어찌됐든 환경과 생명을 주제로 한 글들이다. 그는 어쩌다 환경운동하는 글쟁이가 되었을까?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그의 산문 ‘달려라 냇물아’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을까?

‘달려라 냇물아’는 오래 전 한겨레에 연재하던 생테 에세이인데, ‘어떤 환경쟁이의 내력’이라는 부제가 붙여졌던 글이지요.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장 약한 돼지새끼 한 마리를 다른 튼튼한 새끼들을 위해 개울에 버리자 냇물을 따라 바다 가까이까지 가서 새끼돼지를 되찾아왔던 소년의 이야기지요. 실제로 저는 육친을 존경하건만, 첫 글은 공교롭게도 ‘아버지 비판’이었습니다. 그 후 육십이 넘도록 한 ‘비판적 개인’으로서 세상을 주어진 대로 온순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삐딱한 글쟁이가 된 것은 우연이 숙명이 된 경우인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희가 애쓰던 환경운동 방식은 생명가치의 재발견, 타인에게 무례하고 돈에만 환장한 우리 삶의 반성과 구체적인 참회활동, 그렇게 전개되었습니다. 깊은 분노 끝에 도달한 지점이 자성이었습니다. 새만금 갯벌살리기 때문에 탄생했던 ‘삼보일배’나 ‘생명평화’라는 개념도 그런 의도에서 나왔지요.

 

 

 

‘삼보일배’를 선생님이 창안하고 진행하신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명평화’라는 개념도 선생님 작업이었군요. 정확하게 어떤 뜻인지요?

2000년대 초반 그 말을 ‘환경판’에 들여오고 ‘생명평화선언문’을 작성할 때 제가 생각했던 것은 ‘생명과 평화’가 아니라 ‘(모든)생명들의 평화’였습니다. 20세기가 인간만을 생각한 ‘노벨평화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인간도 포함된 모든 생명체들의 공생, 평화의 시대다, 그런 세상을 만들자는 뜻으로 사용했지요. 역사시대 내내 인간들끼리 지지고 볶았지만, 그땐 그나마 자연에는 해를 끼치지 않았던 시절이었지요.

하지만 산업사회로 진입한 이후 제어가 안 되는 인간의 고약한 산업활동으로 인해 이제는 산 것들 모두 여섯 번째 멸종을 향해 치달리게 되었습니다. 지구온난화를 촉발한 게 바로 우리 인간이지요. 다른 생명체들의 평화가 묵살된 채 인간만의 평화는 어불성설이지요.


선생님은 1997년 상계쓰레기소각장 반대운동으로 시민운동에 처음 달려드신 걸로 아는데, 지구온난화 말씀을 하시니 우리 춘천지역도 일상적으로 덮고 있는 미세먼지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이 궁금해집니다.

당시 쓰레기소각장 건설을 반대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쓰레기를 배출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소각장을 짓되 제대로 잘 짓자”라는 운동을 3년여 벌였지요. 독일의 80분의 1의 건설비, 그것도 30% 대에 덤핑낙찰된 그런 범죄를 목도하면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지요. 미세먼지? 오늘 여기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미세먼지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어요?

미세먼지 문제는 중국 공장지대에서 황사에 실려 날아오는 중금속, 디젤엔진차의 배기가스, 화력발전소의 이산화탄소 배출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원인이 아니고, 작은 징후일 뿐입니다. 근원적 원인은 부국강병이라는 이 세상 모든 국가의 본래적 목표, 경제는 끝없이 성장할 수 있다는 망상을 포기하지 않는 반생명적 삶입니다. 우리 모두 ‘다른 사회’, ‘다른 행복의 길’을 전력을 다해 찾지 않는다면 절대로 미세먼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절망적인 말씀을 하시네요. 그런데 선생님이 꿈꾸는 ‘다른 사회’, ‘다른 행복의 길’이 가능할까요?

아마도 갈 데까지 가야 할 것입니다. 국가는 쉽게 사라질 수 없는 시스템이고, 국가의 목표는 공공연한 부국강병이고, 지구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모두가 끝없이 경제가 성장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부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젠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진행해온 국가의 행복프로젝트는 실패했다고 자인하고, 덜 만들고 덜 쓰고 만들어진 것은 알뜰하게 쓰고, 자연을 자원으로 보는 시각을 걷어치우고, 겸손하고 불편하게 살 각오로 이미 확보한 재화를 공정하고 고르게 나누고, 다른 삶을 통해 행복에 이르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은 자각한 풀뿌리들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얼마 전 발행된 <작가회의> 소식지의 표지에는 선생님의 육필 원고가 게재되었는데, “시인의 책무는 숲을 지키는 일이다”는 제목이었습니다. 시인의 책무와 숲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특히 선생님은 가리왕산 숲을 지키려고 애썼고, 그것이 끝내 파괴된 데 대해 누구보다 가장 늦도록 애통해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가리왕산은 조선시대에도 임금이 베지 말라며 지켰던 봉산(封山)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올림픽 때문에 결국 500년 숲이 베어지고 파괴되었지요. 올림픽이 확정되면서 베고 나면 복원이 안 되는 그 숲의 파괴를 막기 위해 갖은 애를 썼습니다. 그 대안으로 알파인 경기만이라도 북녘의 마식령스키장에서 열면서 북과 공동개최하라고 호소했었지요. 그땐 들은 체도 않고 가리왕산 파괴에 앞장섰던 도지사가 나중에 “스포츠를 통한 남북화해” 어쩌고저쩌고 할 땐 가소롭더군요.
올림픽 3수 이전부터 거기 알파인스키장 들어선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싼 값에 땅을 구입하고, 보상묘목 심어서 훗날 올림픽 확정 후 떼돈을 번 부동산투기꾼이 이 나라 주류들이지요. 그 범죄자들은 적폐청산이 100년쯤 진행되어야 밝혀지고 벌 받겠지요. 시인이 나무가 베어질 때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가 왜 시인일까요? 저는 문학주의자들의 무감각과 둔감함, 개인적 성취만 생각하는 에고이즘을 한심하게 여기고 한편으론 측은하게 바라보는 글쟁이지요. 지금 문인들에게는 작가정신이 사라진 듯합니다.


천천히 조금씩 늘린 그의 툇골 서가는 미로 같다. 그는 보통사람의 입이 벌어질 정도의 장서를 지니고 있다. 2만권? 아니다. 3만권쯤 될까? 그는 “책이 아니었더라면 다른 사람들이 세계를 해석해 주는 대로 얌전하게 따르는 ‘정신 나간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책은 나의 환락 중 가장 큰 부분”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래서 물었다. 지금도 책은 선생님의 환락인가요?

환락이면서 이제는 근심거리예요. 책을 탐하며 살아온 데에는 후회가 없지만, 앞으로 10년쯤 후 시력이 약해졌을 때 저 책들을 어찌해야 할지 근심이 깊어집니다. 그래서 15년쯤 전부터 저 같은 책벌레들이 만년에 조건 없이 기증한 책들로 구성된 ‘기증책전문도서관’ 건립을 위해 깜냥껏 애써왔는데, 성사가 안 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서면의 문학공원 언저리에 그런 국내 초유의 도서관이 건립되면 기증자로 인한 뉴스도 계속 생산되고, 공해도 안 일으키고, 그 특별한 도서관 때문에 춘천의 막국수 매상도 오를 텐데 싶습니다. 춘천이 이 나라 사라지고 있는 종이책들의 메카가 되는 거죠.

“종이책들은 모두 춘천으로 모여라!” 저도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지만 정말 멋집니다. 그런 특별한 도서관이 건립되면 정말 의미가 있겠네요. 그나저나 선생님이 지닌 3만여 권 장서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기증책전문도서관 건립이 쉽지 않은 일인데다, 제가 자주 책 때문에 걱정을 하자 제 작은딸이 지난 설에 <헌책방, 당신들의 책>이라는 블로그(blog.naver.com/yoursbook)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제 살아있는 동안 천천히 책을 내놓고, 제가 사라지고 나면 제 집사람이 책을 내놓게끔 시방 연습 중입니다. 현재 700여권의 책을 엄청 싼 값에 내놓았건만 손님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책을 안 좋아합니다. 다른 오락거리들을 더 좋아합니다. 책을 외면하면서도 ‘좋은 삶’을 만들 수 있을까 묻게 됩니다.(웃음)

그는 어두운 이야기를 할 때에는 분노로 찌푸렸지만, 체질적으로 유쾌한 사람이었다. 땔감 마련하고 시골생활 초기에 좌충우돌하느라 팔이니 무릎이니 성한 데가 없다고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 있었다. 마당의 거위들과 유기견이었던 잡종 진돗개 명심이, 가족이 된 들고양이들을 바라볼 때 그의 얼굴에는 깊은 행복감이 스친다. 그에게 춘천은 어떤 곳일까?

“책이 있는 곳이 바로 제 삶이 있는 곳입니다. 이 나이에 이 책들을 끌고 어디로 가겠어요? 춘천이 제 마지막 삶터지요.”

 

원미경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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