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지난한 세월이었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에서 불타고, 1871년 미군이 강화도에 상륙하고(신미양요), 1882년 조선과 미국은 정식으로 수교한다(조미수호조약).

당시는 중국의 한반도 종주권 행사에 일본이 한창 핏대를 올리던 때였다. 러시아도 군침을 질질 흘렸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들에게 조선은 그리 탐나는 물건이 아니었다. 뒤늦게 아시아에 진출한 미국은 중국대륙, 특히 만주에 눈독을 들였다. 이빨 빠진 호랑이었지만, 중국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러시아의 남하도 신경이 쓰이는 문제였다.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해 한반도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을 구축한 뒤로도 미국은 여전히 일본을 뒤에서 후원했을 뿐 조선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의 양해 아래 조선을 덥석 집어삼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수상 가쓰라 타로와 미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 사이에 맺은 일명 가쓰라-태프트밀약이다.

미국의 대 아시아정책은 2차 대전 종전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명백한 적대국이 되었지만, 일본 패망 후 미국은 다시 일본을 보듬었다. 역시 문제는 중국과 러시아(소련)였다. 그래서 한반도는 미국에게 여전히 먹기 성가시고 버리기 아까운 계륵이었다.

미국에게 북한은 여전히 매력적이지 못하다. 그러니 분단이라는 현상유지도 좋고, 까불면 확 밀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좁쌀만 한 계륵이 핵무기로 맞장을 뜨자고 하니 꽤나 어이없고 부아가 치미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저 엄포가 아니었다. 진짜 미국 본토까지 날아갈 수 있는 ICBM 개발에 성공하자 미국은 경악 그 자체였다.

국제적 제제 강화냐, 군사적 옵션 실행이냐?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제제는 그리 효율적이지 않았고, 전쟁은 위험부담이 컸다. 그러던 차에 북한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짜일까? 진짜라면 나쁘지 않다. 잘만 하면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영향권 안에 둘 수 있다면 중국을 견제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물론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기본적으로 동북아 국제정세가 새 국면에 접어들면서 불확정성이 증가될 것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형국인 것이다. 만약 북미수교가 이루어지고 북한이 본격적으로 개방의 길을 간다면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힘겨루기는 한층 더 첨예해질 것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상도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다. 6·12 북미정상회담이 무난하게 성사됨으로써 평화를 향한 실질적인 행보는 이제부터다. 한국의 외교적 역량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호치민이 한 말 가운데 유명한 말이 있다. ‘이불변(以不變) 응만변(應萬變)’, 즉 ‘내 안의 변하지 않는 원칙으로 만변하는 세상에 대응한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원칙은 평화와 번영이다. 그 원칙을 가지고 변화무쌍한 국내외 정세에 대응해 나가야 한다. 문제는 내적 동력이다. 국민의 삶에 변화가 없다면 환호성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

마침 6·13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압승했다. 압승에 기고만장하지 않고 더 겸허하게 민의를 받들어 사회개혁에 박차를 가한다면 국민의 신뢰는 더 높아질 것이다. 그 신뢰의 힘을 바탕으로 북한도 미국도 중국도 적절히 견제하며 동북아 평화를 견인해야 한다. 국민의 신뢰 말고 더 큰 외교적 수단이 무엇이란 말인가!
 

전흥우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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