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시선(詩仙) 이은무 시인

“난 ‘종북’은 아니지만 반미친북이야.”
 

시인이 대뜸 아주 당당하게 말한다. 여든을 바라보는 원로시인 이은무(78). 그는 말보다 작품으로 세상을 더 강하게 풍자한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된 가운데 북의 김정은 위원장에 바라는 글, 통일을 바라는 마음, 남북 해빙무드와 관련된 시편들이 강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시인은 디딤글에서 “랑리아! 네 이름을 바로 부르는 날을 위해서 나는 오늘 또다시 네 이름을 거꾸로 부름이다. 랑리아!”라고 적었다. 은유인 듯 직설적으로 내리꽂는 날카로운 시어들이 독자들의 마음을 훑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시 속에는 흙냄새가 있고 농부의 마음이 있고 사람이 있다.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그동안 시집 《낮은 소리로》, 《핏줄》, 《하얀 거짓말》, 《명궁》 등을 펴낸 데 이어 2005년 북한 어린이를 돕기 위해 차 한 잔 값의 시집 《랑리아》를 펴냈다. ‘아리랑’을 거꾸로 불러 제목으로 삼은 이 시집은 분단된 민족의 아픔과 권력의 부조리를 꼬집은 70여 편의 시가 실려 있다. 올해 2집인 《다시 랑리아》를 펴냈다. 2집에는 1~4절로 구분돼 총 97편의 시가 실렸다. 희수를 넘긴 시인과의 인터뷰는 동화였다. 방정환의 《만년샤쓰》를 한 권 읽은 듯한 동화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시인이 꿈이었어. 별로 유명하지 않은 시인이지만 시를 평생 공부했지. 그런 나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의 시는 잘 모르겠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시가 시를 쓴 거지 사람이 시를 쓴 게 아니야. 한글만 알면 많이 배웠건 못 배웠건 자신의 감정을 써내고 ‘아~ 그럴 수 있겠구나’, ‘그렇구나’ 하면서 나름대로 읽는 사람이 감동을 받고 느낌이 온다면 시인 거지. 요즘 일부 시들은 너무 난해하고 거창해. 독자를 버리는 시고, 독자를 무시하는 시야.

시인들 보면 나름의 시론이 있고 그러더군. 난 시인도 하나의 농사꾼으로 알고 살아왔어. 서점에서 잘 팔리는 시집은 아니지만, 농사가 몸을 위한 농사라면 시는 마음을 위한 농사인 거지. 조금 고상하게 하면 영혼의 농사야.”

 

 

언젠가 한 공예가와 짧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 그 작가는 그랬다. 전공도 안 한 어쭙잖은 사람들이 그림에 대해, 공예에 대해, 예술에 대해 논하는 걸 보면 참을 수 없이 속이 뒤틀린다고. 그에 대해 전공을 불문하고 작품으로 관객에게 감동을 준다면 타고난 예술가가 아니냐고 반문했었다. 노 시인의 말처럼 시인의 품격이 농부의 마음과 같다는 데 격하게 동의한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어서 그 농작물을 본인도 먹지만 이웃사촌과 나누지. 그땐 먹을 수 있는 농작물을 나누는 거야. 요즘 시인들이 많기는 많은데 생산해내는 시들이 일반 독자들이 먹을 수 없는 모래알 같은 농작물을 내놓는단 말이지. 누구를 위해 시를 쓰는 건지. 나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지 않았다면 시인이 되지 않았을지도 몰라. 시는 외로움 속에서 잉태되거든. 난 대학도 못나왔고 내 스승은 김소월 선생이야. 초등학교 때 우연히 김소월 시를 만났어. 그분의 시가 어린 내 마음을 많이 위로해줬지. 그리고는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거야.”

네 살의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후 어머니의 부재로 작은 가슴에 가득 찼을 외로움의 크기를 감히 짐작해보았다. 초등학교 6학년 아이의 마음에 김소월의 시가 위안으로 다가왔을 만큼 서러움과 외로움의 깊이가 깊었으리라. 소년 이은무는 그렇게 철이 들고 또 그렇게 시인이 되어갔을 것이다.

“내가 자존심이 좀 강했어. 친구들과 야외를 나가면 각자 돈을 걷지. 내 몫을 감당하지 못하면 난 안 갔어. 그래서 단체활동보다는 낚시처럼 혼자 즐기는 취미를 많이 즐겼지. 예전엔 사람 만나는 것도 싫어해서 방송 인터뷰나 출연요청이 와도 거절했었어.”

김소월의 시에서 엄마 품을 느낀 소년 이은무가 시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듣다가 학창시절 문학활동에 대해 물었다. 이내 ‘말죽거리 잔혹사’가 펼쳐졌다.


“초등학교 때는 주로 혼자 시를 읽었고, 중학교에 가서 문예반 활동을 했지. 정확히 말하면 난 중학교도 제대로 졸업을 못한 거야. 중학교 3학년 초에 선생님과 다툼이 있었어. 내가 어머니가 없어 풀이 없다며 뼈 없는 사람처럼 왜 그리 흐느적거리느냐고 자주 말했었지. 난 그게 큰 상처였어. 영어선생이었어. 어느 날 영어시간에 우리 반 망나니 친구가 수업시작 종이 울린 걸 모르고 책상 위를 뛰어다니며 장난치다가 걸린 거야. 영어선생이 그 친구를 잡아채더니 ‘아주 악질’이라고 말하는 거야. 수업을 마치고 손을 들었지. 사제지간에 악질이라는 용어가 적절하냐고. 세 번을 다시 묻기에 같은 말을 반복했더니 다짜고짜 때리더군. 코뼈가 부러졌어. 일주일 후에 동아일보에 ‘폭력교사’로 그날 일이 기사화 된 거야.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선생들이 나를 이상하게 경계하는 거야. 당시 우리 집 형편이 월납금도 내기 어려운 처지여서 늘 밀리곤 했거든. 가난한 한 부모 가정에다 당돌하게 교사에게 대드는 학생으로 낙인이 찍혔으니 고등학교엘 가봐야 나를 경계하고 차별할 것은 뻔하다 싶어 진학을 포기했어. 그리고 보통고시를 준비했어. 오늘날 공무원 시험 정도 되는 거 같아. 관련 수험서를 보니 온통 한문인 거야. 그래도 1년간 그 교재들을 모두 독파했어. 그렇게 시험준비를 하던 중에 문학하는 친구들을 만나 거기에 빠져버렸어. 강원대 전상국 교수가 ‘절친’이야. 그 친구가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때는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더라고. 당시에 전상국이 경희대에 재학 중이었어. 그 인연으로 경희대 학보지에 시를 투고했는데, 당시 조병화 선생이 극찬을 하며 내 시를 실어준 거야.”

문학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공무원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시인으로 살게 된 것이 아주 잘된 일이라고, 후회 없는 인생이었노라 말한다. 어릴 적 배운 바둑으로 요즘 전상국 작가를 비롯해 친구들과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 바둑을 배운 것도 참 잘한 일이라고 말한다. 매사를 감사해한다. 작품을 쓰는 것이 중요했고 만족스러웠던 그였기에 등단은 중요하지 않았다. 요즘은 돈만 있으면 될 만큼 등단이 수월해졌지만, 그 시절에는 꽤나 까다로웠다. 그도 2년여를 준비하고 공을 들여 서른을 넘긴 나이에 등단을 했다. 아픔일 수도 있을 그 옛날의 기억을 소환하면서도 그때 그 시절을 더듬는 그의 목소리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의 소설을 이야기하듯 잔잔했다.

 

 

“내 시가 가장 먼저 활자화 된 곳이 강원일보야. 1965~67년 사이쯤 되는 거 같군. 내 고향은 홍천인데 1970년에 춘천으로 넘어왔어. 전상국 작가가 교사로 있던 춘천중학교에 사서자리가 났으니 오라는 거야. 가보니 도서관을 새로 지어 교실 가득 책이 있는 거야. 당시만 해도 책을 사보기도 어려웠고 귀했으니까 냉큼 마음을 먹었지. 당시 내 최종학력이 중졸이라 사서업무를 하면서도 정식 사서 직책을 받을 수는 없어서 임시직으로 10년을 일했지.”

그의 시는 세상을 향해 강하게 저항하면서도 삶에 대한 애착이 묻어난다. 올해 출간한 《다시 랑리아》는 유독 북한과 시국에 대한 주제가 많다. 가난과 편부모 밑에서 자존감을 세우기 힘든 여건임에도 하늘같은 선생님의 언행을 지적했던 당돌함은 핏속을 흐르는 저항DNA 때문이지 않았을까.

“난 김정은 위원장이 정말 예뻐. 한민족사에서 역사 이래 이순신, 광개토대왕, 6·25전쟁처럼 세상의 이목을 끈 사람과 일들이 많았지만, 김정은만큼 요즘 우리나라를 세계적으로 주목시킨 인물이 없잖아.”

시인은 현대 시인들이 너무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불만이다. 민족을 걱정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이야기가 ‘참여시’라는 것으로 별도의 분류가 필요한지 반문한다. 동년배들을 향해 ‘꼴통보수들’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그지만 주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단다. 끝이 없는 언쟁은 소모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춘천중학교를 퇴직하고 학교 앞에서 문구점을 운영했다. 학교 준비물을 챙기는 아이들로 붐비던 그 시절의 문구점은 중년을 넘은 이들에겐 추억의 터널이기도 하다. 마음의 텃밭에 푸성귀를 키워 소찬을 차려내는 마음으로 그렇게 시를 쓰겠다는 시인은 이 아름다운 강산을 두고 갈 것이 가장 아깝다고 말한다. 주어진 시간 사람도 자연도 더 많이 사랑하며 살 것이라는 그에게 40년 춘천살이는 행복이었단다. 아픈 기억으로 점철된 홍천보다 푸근한 춘천이 고향이라고 말하며 그는 덧붙인다.

“춘천은 시인들의 천국이야. 시는 적당히 감추고 적당히 드러내는 안개 속의 산물이어야 하거든. 너무 드러내도, 너무 감추어도 안 되는 거지.”

앞으로도 꾸준히 시국과 관련된 시를 쓰겠느냐는 질문에 시인은 작업 중인 시로 답한다. 거동이 가능한 순간까지 연기를 하다 무대 위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노구의 배우처럼 펜을 잡을 힘이 있는 한 이은무 시인의 필력은 세상을 꾸짖을 듯싶다.

 

임희경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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