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면 안보리(安保里)는 강변마을이다. 북으로 길게 용이 누워있는 것 같다 해서 이름이 붙은 와룡산과 서쪽의 월두봉이 마을을 감싸고, 동쪽으로는 당림리와 맞닿아 있는데, 현 당림초교 부근이 안보역으로 추정된다. 예로부터 한양에서 가평을 거쳐 춘천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고, 물길을 통해 세곡선(稅穀船, 나라에 바치는 곡식을 실어 나르던 배)이 다녔다. 안보역은 석파령을 넘기 전 말을 갈아타고 사람과 말이 쉬어가던 곳이었다.

강변에는 포구가 있어 돛단배가 많았는데, 붉은 불을 켜 놓아 이 포구를 ‘붉은뱅이굼치’라 불렀다고 한다. 자연히 사람이 많이 모이니 장도 서고 주막과 여관도 많았다. 와룡산에서 흘러드는 물은 따뜻했는데, 강변에 샘이 있어 이 마을 할머니들은 겨울에도 빨래하기가 좋았다고 기억한다.

댐이 만들어지면서 강변마을은 일부 수몰되고 도로가 생겨 강가에 살던 사람들은 와룡산 자락으로 옮겨가 살았다. 강 건너 백양리 뒤쪽 산 능선이 갈매기가 양 날개를 펴고 마을로 날아드는 모습 같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안비(鴈飛)마을은 1970년대 정부에서 돌집을 지어 강제로 이주시켜 새마을촌이라고도 불렸다.

안보1리와 2리를 잇는 편히 다닐 마을길이 없었다. 경춘국도로 돌아 나와 다른 마을로 이동해야만 했다. 쌩쌩 달리는 차들로 위험할 뿐 아니라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안보리와 가장 가까운 강 건너 백양리역은 그저 풍경일 뿐이다. 강변으로 쉽게 내려갈 수도 없다.

“우리는 뻔히 보이는 백양리역에는 안 가요. 무슨 건축상을 받았다는데, 도대체 누굴 위한 역인지 모르겠어요. 여기서 가평까지 택시를 타도 1만2천원이면 가는데, 코앞에 있는 백양리역도 아니고 강촌이나 굴봉산역으로 돌아가면 1만5천원이에요. 백양리역으로 가면 더 들지. 그래서 가평역으로 가요. 주민들은 거의 노인들이고 차가 없어요. 차는 못 다녀도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출렁다리 하나 있으면 좋겠어요. 스키장과 골프장을 위한 역인가 싶어요.”

마을사람들에게 백양리역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한 번도 가본 일이 없는 안보리, 고속도로가 생겼지만 부러 국도를 따라 음악과 함께 하는 드라이브는 물안개를 만나면 더욱 좋았고, 안보리를 지날 때 연달아 나타나는 주유소의 기름 값에만 집중했던 일이 슬그머니 미안해졌다.

북한강과 백양리역, 스키장의 슬로프가 보이는 풍광 좋은 언덕에 자리 잡은 이씨는 서울에서 한양공대를 나와 사업을 하다 몇 년 전부터 이곳에서 과수농사를 시작했다. 체리나무와 대추나무를 500주씩 심었다. 초보 농군은 나무들을 너무 가깝게 심어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더 자라기 전에 사람들에게 나눠 줄까 봐요. 서울에서 어찌 살았는지…. 무슨 일이 없어도 서울은 그냥 짜증이 났는데 여기 오니 사람 사는 거 같아요.”

이씨의 집수리를 하던 조씨는 길 건너에서 카페를 10년 하다가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장사를 접고 마을 안으로 들어와 산 지가 10년째다.

“홀딱 망했어도 마을에서 소일하며 살고 있어요. 욕심 안 부리고, 사지 멀쩡하면 다 살아요.”

웃는 폼이 무척 여유로워보였다. 다윤이네 식당 뒤에 있는 안보1리 마을회관으로 할머니들이 모여들었다. 어르신들에게 민요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도착하자 장구 장단에 노랫가락이 우렁찼다.

 

“다 같이 모이면 재미지니 한 시간이나 걸어서 여길 왔지.”

풍채가 좋은 전영희(81세) 할머니는 노동골에서 나고 자랐다. 탑골로 시집가 살았는데 시댁 식구들도 많아서 나물죽으로 끼니를 잇고, 더덕이며 산나물을 한 가마씩 억척스럽게 채취해 그걸 팔아 땅을 늘렸다. 2005년 수변구역 지원금을 받아 세운 마을회관 옆에 세워진 게이트볼장에서는 북한강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뒤쪽에는 건강관리실도 있었다. 할머니들은 민요교실이 끝나고 검정콩을 나누어 화투놀이를 했다.

“끝나면 콩을 다 모아두었다 다음에 또 놀고, 몇 년째 이걸로 노니까 반질반질해졌어. 10원짜리 비누내기라도 돈 가지고 하면 의 상해서 안 돼.”

노인회 총무라는 남궁광철(72세) 할아버지는 왼쪽 손이 없다. 단양 공장에서 일하다 기계에 손목이 잘렸다. 40대에 그리 되고 앞이 캄캄하고 좌절감이 깊었다. 소양로 사는 친척집에 우연히 왔다가 시내에서 2년을 살고 안보리에 온 지 20년이 되었다. 집도, 땅 한 평도 없고 다만 오래된 집을 세 얻어 내부를 손보고 지붕을 개량해서 살고 있다. 장애인수당으로 월 70만원을 받고, 들깨농사를 지어 1년에 400만원 정도를 번다. 텃밭에서 채소도 기르니 별로 돈 들게 없다고 한다.

“그래도 아직까지 애들한테 한 푼도 도움을 안 받아요. 오히려 내가 곡식이며 보태주지. 우리 동네는 담이 있기를 하나 젤로 인심이 좋아.”

 

할아버지는 불편한 손으로 마을회관의 주변 시설의 창고 문까지 열어 자세히 설명하고 노인회에서 시청로비에 전시했다는 도자기그림과 천연비누도 꺼내어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청풍부원군묘는 가 봤어요? 동네사람이야 괜찮지만 요즘은 세상이 숭악해서 혼자 가면 안 돼.”

사실 신도비를 보고 풀이 무성한 산길을 좀 가다가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동네사람들에게 정보를 얻어 가려고 다시 돌아 나왔던 터였다. 할아버지는 신도비를 지나 잣나무가 4그루 서 있는 길옆 묵밭에 섰다

“여기가 상여집이 있던 곳이야. 내가 이 마을에 왔을 때도 있었는데 지붕이 너와였어. 비도 새고 낡아서 허물고 그 안에 있던 부원군 상여는 박물관에서 실어갔지. 길 건너 국도변 ‘강빛노을’집 자리에 묘막이 있었어. 지금도 돌담의 흔적은 남아있는데, 상여는 왕실에서 하사한 것이니 아주 대단했지. 묘막도 다 뜯어서 5톤 차 두 대로 실어갔어. 다 복원해서 마을에 있으면 좋겠어."

김우명(金佑明 1619~1675)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金堉)의 둘째 아들이며 조선 18대 임금인 현종의 장인이다. 외손자인 숙종이 즉위한 해에 죽었다. 김우명의 상여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상여인데, 마을사람들도 이용하다가 2002년 10월 문중에서 기증해 국립춘천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당시 궁중 상여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국가민속문화재 1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춘천국립박물관에서 본 상여는 나무 조각이 아름답고 격조가 있다. 지붕 앞뒤에는 용을 새겨 넣은 반원형의 용수판이 있고 네 귀퉁이에는 봉황꼭두가 서 있다. 꼭두는 인물, 동물, 꽃과 새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이의 동반자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묘역으로 가는 산길은 계단이나 배수로가 자연석으로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청풍부원군 묘소에서 강과 건너편 산이 훤히 내다보였다. 묘소 둘레에는 돌이 군데군데 박힌 토담이 있다.

 

산 아래 묘역 안내판 왼쪽에는 산신제를 지내는 당이 있었다. 계관산신령과 와룡산신령에게 음력2월 초하루에 돼지머리와 떡 과일 등을 올리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한다.

안보리는 골짜기마다 요양원이 있고 경춘공원묘지가 있는 곳이다. 국도변에는 굿당이 있고 작은 사찰들도 유난히 많다. 안보리를 생각하는 내내 ‘축제’가 생각났다. 꽃상여를 타고 하늘소풍 길에 축제를 한바탕 벌여 남은 자의 슬픔을 위로하고 망자의 영혼도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축제, 지역의 예술가들과 시민이 어울려 전통장례문화를 공연예술로 승화하는 하늘소풍길 축제를 상상했다.

김예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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